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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 킹즈 베스트 앨범
2002-02-21

음악, 그들의 본능 혹은 언어!

집시들에겐 끓는 피가 있지만 자기들 말이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나라가 없다. 엄밀하게 말해 그들에게는 국적이 없다. 그들의 몸을 가둘 국경도 없다. 남쪽 집시들과 동쪽 집시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그 지역의 말을 쓰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에게는 음악이 있다. 음악만이, 그저 끓기만 하는 그들의 떠도는 피에 보편성을 부여한다. 동쪽 집시의 바이올린 선율과 스페인쪽 집시의 기타 선율은 기본적으로 같은 음계 위에서 움직인다.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가 그렇게도 잘 연주했다는 <찌고이네르 바이젠>과 안달루시아의 플라맹고는 한 피를 지닌 사람들의 손가락에서 나온 음악이다.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집시의 멜로디를 가장 대중적으로 편집하여 들려주는 사람들이 바로 집시 킹즈다. 이들은 프랑스 국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이들은 스페인 집시의 후예들이다. 집시 킹즈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레예스 가문은 저명한 플라맹고 기타리스트 호세 레예스를 배출한 가문인데, 이들이 스페인 내전 때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들어온 것이다. 집시 킹즈의 니콜라스, 앙드레, 카뉘, 파차이와 폴은 모두 호세 레예스의 아들이다. 집시 킹즈의 다른 한 축인 토니노, 파코와 디에고는 모두 발리아르도 가문이다. 이들은 마니타스 델 플란타라는 역시 유명한 플라맹고 기타의 명인의 조카들이다. 레예스 아이들과 발리아르도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집시 캠프에서 함께 뛰어놀았다고 한다.

집시들이 기타나 바이올린을 쥐는 것은 거의 본능적이다. 그들은 배울 사이도 없이 전광석화 같은 프레이즈를 구사하는 명인들로 자란다. 전설적인 집시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는 어릴 적에 캠프에서 불이 나 손가락 두 개가 붙어버렸는데, 오히려 그 때부터 기타를 더 잘 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연주에 관한 한, 집시들의 타고난 재능은 신비에 속하는 일이다.

집시 킹즈의 인기는 80년대의 히트작 <밤볼레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태양을 찌를 듯 퍼지는 특유의 코러스와 신나는 리듬, 그리고 불을 뿜는 플라맹고 기타로 이루어진 이 곡을 통해 집시 킹즈의 음악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다. 이들의 또 하나의 히트작 <운 아모르>는 비극적이면서도 정열적인 사랑 노래다. 신나는 <밤볼레오>와 비극적인 <운 아모르>, 이 두 분위기가 집시 킹즈를 규정한다.

이번에 나온 2장짜리 베스트 앨범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CD 한 장의 제목은 <열기>(fever), 또 한 장의 제목은 <정열>(passion)이다. 이 두 장에 그들의 진수를 담았다. 집시 킹즈의 국제적인 성공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신나는 음악에 이들은 현대적인 댄스 음악의 상투적 구성들을 삽입시킨다. 비극적인 노래들에 현대적 팝 발라드의 조미료를 친다. 그렇게 하여 서구의 팝 팬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는 그리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집시 킹즈 같은 ‘오리지널’의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그 ‘침윤’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롭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