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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용의 <그의 나라>
2002-03-14

파멸한 세상으로의 탈출

한 소년이 배에서 떨어져 무인도로 표류해간다. 처음에는 ‘살려달라’고 외치며 어쩔 줄 몰라 하지만, 금세 현실을 깨닫고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카메라 렌즈로 모닥불에 불을 붙이고, 판초에 맺힌 이슬로 식수를 해결한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물맷돌을 직접 만들어 새를 잡고, 대나무로 낚시하는 법도 어렵지 않게 익힌다. 겨울이 다가오자 나무와 짚을 엮어 집을 만들고, 썩은 머루로 만들어낸 술로 한껏 취해보기도 한다. 정말 대단하다. <마스터 키튼>이나 <고르고 13>도 두렵지 않은 프로페셔널한 생존의 능력이다. 하지만 3년이 지난 뒤 소년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뗏목을 만들어 육지로 향한다. 약간의 시련은 있지만 역시 예상 밖으로 쉽게 도착. 그러나 진짜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한 소년이 고립된다. 천신만고 끝에 바깥 세상으로 나온다. 그러나 자신이 이전에 알던 안락한 세상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이제 어디로 탈출할 것인가? 우리는 동아시아 소년 만화에 흐르는 장대한 파국의 피를 알고 있다. 고립된 작은 세계와 그 바깥의 완전히 파괴된 세계라는 설정은 바로 얼마 전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드래곤 헤드>라는 진품으로 맛본 바 있다. 그런데도 박흥용은 다시 도전한다. “정말 꼭 그려보고 싶었던 내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 주제는 정말로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기 위한 통과의례로도 보인다. 진정한 만화가라면 한 세계, 그 궁극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주인공은 소년, 혹은 소녀다.

무인도, 평화로운 ‘그의 나라’

박흥용은 주인공 쌍판이 무인도에서 자립해 나가게 되는 과정을 제법 긴 분량을 통해 그려나간다. 사실 초반의 흐름에 몸을 맡겨버리면 이 작품 전체가 한 소년의 낭만적인 무인도 표류기일 것이라고 예측되기도 한다. 2권에서부터 펼쳐지는 파국의 세계와 비교해보면 무인도의 생활은 작은 천국으로도 보인다. ‘내가 곧 법, 내가 곧 왕, 내가 곧 국민’인 주권 국가, ‘18살 미만이니 19살 미만이니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유 독립국가인 것이다. 그런데 왜 쌍판은 육지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작품의 전반에서 쌍판의 무인도 생활을 위태롭게 할 실제적인 위협은 발견되지 않는다. 별다른 자연재해도, 목숨을 노리는 맹수도 없다. 신기하리만큼 재빨리 자급자족의 생활을 갖춘다. 그 흔한 식중독도 없고, 설사조차 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게다가 육지생활에 대한 미련으로 인한 욕망도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지도 않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어 미치지도 않는다. 유일하게 남아 있다면 섹쉬 여선생에 대한 욕정이랄까? 그러나 그것도 다소 전형적인 박흥용식 여성 묘사라서 그런지, 구체적인 실감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쌍판은 태연하게 반가부좌로 앉아 성경을 읽으면서 보낼 수 있는 타고난 도인이다.

‘요한계시록의 찢어진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육지로 돌아가게 되는 그의 결심은, 어쩐지 ‘문제가 없는’ 권태로운 일상을 떠나 ‘진짜 문제’를 찾아서 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 문제란 무엇인가? 이 만화 속에서 세계의 대파멸을 가져온 국가, 종교, 민족간의 갈등, 결국 인간과 인간의 갈등이다. 만화 <표류교실>, 소설 <파리 대왕>, 영화 <비치> 등 고립의 테마를 다룬 작품들에서 항상 문제의 초점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다. 한정된 식량을 두고 누가 먹을 것인가, 제한된 여자를 두고 누가 차지할 것인가, 인간들은 야수처럼 싸우게 된다. 거기에서 무자비한 힘의 대립을 막기 위한 정치가 태어난다.

<그의 나라> 무인도 부분은 이러한 문제가 결여되어 있다. 혼자 표류하기 때문에 인간간의 갈등은 없다. 햇빛에 얼굴의 절반이 타, 홍씨(紅氏)와 백씨(白氏)로 나뉜 쌍판의 두 인격은 서로 대립하지만 결코 그 대립이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사려파’와 ‘행동파’라는 인간의 두 내면이 매우 적절하게 서로를 견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다시 돌아온 육지에서 비로소 인간간의 대립이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국가와 경찰의 통제가 상실된 사회에서 그룹들간의 강간, 살인, 약탈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만화가는 작품 전체의 해답을 초반에 던져놓고 그것으로 이어질 문제들을 풀어나가려는 것일까?

진실성의 힘을 기대한다

주인공 쌍판은 사건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문제적 인간’이라기보다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는 ‘구도자’로 보인다. 이것은 만화의 갈등과 긴장 구조에 어느 정도 약점으로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힙합 바지를 입고 십대식의 어투를 구사하긴 하지만, 어딘지 현실 속의 청소년으로는 보이지 않는 쌍판의 묘사 속에서도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이놈 말뚝아’, ‘감미로운 색소폰과 어우러지는 그녀의 스카프’, ‘음메, 이 종아리 하얀 살결 좀 봐’ 같은 표현은 고전적 걸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향수의 명작 <내 파란 세이버>에서라면 분명히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소년들에게는 숨길 수 없는 ‘아저씨 냄새’로 느껴질 것이다. 물론 이런 사소한 위화감도 거대한 힘 앞에 서면 한낱 먼지로 사라져갈 것이다. 그 힘은 어디에서 올까? 진정 빨려들 수밖에 없는 파국의 묘사와 그 속에서 찾아내는 강렬한 진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박흥용의 진실성이 가진 힘을 기대해본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