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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2002-03-14

100년의 거울

출판은 여자들이 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화들짝 눈을 켜고 긴장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운동권에서만큼은 난 이 말을 거의 명제 수준으로 신봉한다. 술자리에서 인심좋게 책 내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면 손해가 1천만을 쉽게 넘본다.

그렇게 ‘덕’이 쌓이면 뭐하나. 고료를 지불 못하게 되니 덕이 ‘악업’으로 직결되게 마련이다. ‘운동권 여사장’은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나병식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옮겨가고 그의 아내 김순진이 총책을 맡은 ‘풀빛’출판사를 찾아가는 일은 기분좋았는데 위 책을 선물받아 오니 역사선생인 아내도 반색이다.

확실히 이 책은 기존 역사학자들의 구한말관(舊韓末觀)을 기분좋게 깨부순다. 고루가 질타되고 2분법이 극복되고 왜곡이 교정된다. 3∼4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분량에 이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독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재미는, 분량 운운했지만, 사실 엄청난 노고의 결과다. ‘서구인이 쓴 한국 풍물지’ 전집 23권을 번역출판한 뒤 약 10개월에 걸쳐 <주간조선>에 간략한 소개 형식으로 연재한 글인 것이다.

표류해온 하멜 일행을 통해 네덜란드의 문물-병기제작술을 배우기는커녕 이상한 춤을 추는 광대로 전락시켰던 조선 조정의 무능, 나폴레옹이 재혁명에 성공했다면 정복지로 택했을지 모르는 ‘서해 5도’, 탁월한 문화인류학자였던 오페르트, 가슴으로 조선의 처지를 동정했던 데니와 머리로 수긍했던 밀렌도르프의 논쟁, 조선인의 단백질 섭취가 부족한 것을 걱정했던 칼스의 육식론 등등 조선의 실정과 서양의 과학이 서로 섞여드는 광경은 신기한 사실들로 가득하다. ‘사실의 재미’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유감인 것은 글의 기개가 문장을 파괴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뒤로 갈수록 긴장도가 떨어지기도 한다. 좀더 근본적인 것은 당시 조선이 봉착한 문제점에 대한 외국인들의 (타당한) 분석과 대안을 너무 간단하게 100년 뒤 오늘에 대입시키려는 저자의 태도다. 100년 전 역사는, 아무리 현재와 닮았다 하더라도, 모든 면에서 ‘100년 전’ 역사다. ‘100년 전’ 역사는 ‘100년 전’ 거울이 아니라 ‘100년의’, ‘100년 진행의 공간화’로서 거울 아니겠는가. 기존 역사학의 문제의 연원이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원전을 읽고 싶게 만든다는 점이겠다. 우선 아내가 그럴 모양이다. 덕분에 나도….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