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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순지` O.S.T 베스트
2002-03-21

서정만큼 깊은 퇴폐

바야흐로 때는 봄. 지난해 내내 불어댄 모음앨범 열풍이 음반업계를 황사처럼 뒤덮고 있는 중. O.S.T 음반업계라고 그 바람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봄에 어떤 영화음악을 모아야 대중에게 다가가기가 쉬울 것인가. 이번엔 음반기획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본다. 그들에게는 터지느냐, 안 터지느냐, 그게 문제다.

그 정답 중의 하나가 바로 ‘이와이 지’ 모음집이 아닐까. <러브 레터>의 빅히트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와이 월드’라는 일본풍의 신조어를 낯설지 않게 만들었다. 그 감각적인 화면에 붙었던 감각적인 멜로디를 모은 앨범. 음….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선물하기 딱 좋다, 뭐 그렇게 생각했을까.

하여간, 일본 젊은 감각의 대중적 표본인 이와이 순지 영화들에 쓰인 음악을 한데 모은 앨범이 달뜬 봄 시즌을 겨냥하여 나왔다. <언두> 같은 그의 초기 단편에서부터 <러브 레터>나 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영화를 망라하고 있어 이 감각적인 신인류가 영화 속에서 어떻게 음악을 다루는지 한눈에 조망해볼 수 있다. 모두 6편의 영화에서 26곡을 뽑아 실었다.

그의 O.S.T 모음집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이름은 ‘레미디오스’(Remedios). 이들이 이렇게 유명해진 뒤에도 계속 베일에 싸여져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대중적으로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프로젝트 그룹으로 알려진 이 음악집단, 혹은 개인의 음악은 뉴에이지적인 깔끔함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 깔끔함은 상당히 퇴폐적이다. 이와이 순지의 깔끔한 화면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 깔끔함은, 자기 상처나 기억, 내밀한 공간에 대한 신경증적인 집착을 타자에 대한 이해나 배려보다 앞세우는 철학으로부터 나온다. 뉴에이지의 퇴폐도 마찬가지로 거기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레미디오스의 음악을 매우 서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음악적으로 매우 중성적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감정을 표현한다기보다는 감정이 화면에서 표현되도록 조장하는 음악. 이런 정도의 피아노 선율, 스트링 선율은 사실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다. 멜로디 하나로 완전히 끝내버리는 촌철살인을 이들의 음악에서는 구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왜 뇌리에는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으로 새겨져 있을까. 그것은 화면 때문이다. 화면 속에서 그렇게 기능하도록 짜여진 음악이다. 이런 걸 보면 매우 흥미로운 가설 하나가 성립한다. 사람들은 음악의 인식을 단지 소리에 의해서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때로는 그 음악이 흐르던 공간, 혹은 장면의 아름다움과 겹쳐 인식된다. 이런 공감각이 무의식중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영화음악을 하는 사람이면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연구대상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