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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김송희 사진 오계옥 2018-01-16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아마도 이번 생애 내내 이마를 비추고 발목을 물들이는 것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그것은 기억이고, 향수다. 나애는 9살 무렵에 병원집 뒷마당에서 함께 놀았던 상, 도이를, 잠든 나애의 머리맡에서 이마를 짚어주며 전래동화를 자장가처럼 읊조리던 종려 할매를 생각한다. 물론 헤어진 이후로 어른이 된 지금까지 한순간도 잊지 않고 계속 생각하며 산 것은 아니다. “사람이 줄곧 그것을 생각할 수는 없다. 이따금 생각한 것이다. 늘 잊고 살다가 문득문득 생각한 것이다. 평생 그럴 것.”(36쪽)이므로. 지금은 희도와의 다른 생활이 있고, 주변은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래도 나애는 알고 있다. 우물 속처럼 따뜻하지만 어둡고, 그래도 빛이 있었던 그 시절의 시간들이 지금을 있게 했다는 걸. 그게 몇살이었든 사람은 위로받고 상처받고 충만했던 기억을 온몸에 저장하며 살아간다.

<해변빌라> 이후 3년 만에 나온 전경린 장편소설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의 이야기는 현재 시점에서 1970년을 기억하는 식으로 현재와 과거가 종횡으로 교차된다. 나애의 어린 시절 서서히 서로를 잃어갔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들이다. 인물 형상은 때론 정교하면서 어느 때에는 턱없이 흐릿하다. 과거 속 아이들은 나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만 머물고 있으므로 주로 나애를 바라보던 시선으로만 기억된다. 소중한 것을 상실하고 나서야 도리어 마음이 편해져 그것을 마음의 상자 속에 넣어두는 나애. 그의 기억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홀로 빛난다. 다시금 전경린을 기억하게 하는 소설이다. 인물의 운동이 아니라 감정의 운동만으로 이렇게 휘몰아치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였고 허투루 읽기 아까운 문장을 쓰는 작가였다. 나애의 세상은 작가가 오랫동안 거르거나 골라 선택한 단어들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이렇게 민틋하고 섬세하고 치밀하며 실낱같은 묘사는 실로 오랜만이다. 할머니의 따뜻한 품을 ‘마른풀을 펴놓은 텅 빈 헛간같이 아늑’하다고 설명하는데 안겨 있는 온도와 할머니 냄새가 맡아지는 이 노릇.

마음이 아프니까요

상실은 두려우면서도 친숙했다. 언젠가 몇번이고 겪었던 일이 또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잃어버릴 때 안심하는 것일까. 왜 잃어버린 것들이 오히려 더 안전하게 느껴질까. 오히려 더 확고하게 나의 것 같을까. 현실은 여기까지이다. 여기서 끝이 난다. 희도는 떠나지만, 이제 현실의 이름을 지우고 내 안의 세상을 살 차례였다. 나의 안에는 그런 장소가 있다. 한번 일어난 일은 영원히 복기되는 곳.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49쪽)

‘그때 난 마음이 다 찢어졌어요. 마음이 다 찢어지면, 그 다음엔 자기 마음의 바깥에서 살게 돼요. 자기 마음의 바깥이 어딘지 알아요? 거긴 세상의 바깥이에요. 나 혼자뿐인 것 같은 세상에서 언제까지나 등불을 안고 걸어가는 거예요.’(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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