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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회의 <해바라기 꽃미남>
2002-04-18

백수의 도

‘무사의 도’처럼 ‘백수의 도’가 있다. 백수로 살기가 세상 어느 분야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백수의 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에게 주어진 무한정의 시간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바쁜 샐러리맨처럼 시간을 쪼개고 분배하는 능력이 아니라 한정없이 긴 시간을 자신의 뜻에 맞게 조절하는 능력이다.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한숨의 잠으로 날려버리고, 무료한 오후의 한두 시간도 불과 몇분처럼 느껴야 한다. 두번째, 자신의 일상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창조적 능력이 필요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주변에서 새로운 일을 만들며, 그것을 통해 삶을 즐겨야 한다. 마지막으로 백수의 도를 함께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 대화와 해프닝, 그리고 창조적 열정을 함께 발산할 친구가 있어야 한다. 백수의 도는 이처럼 쉽지 않은 조건들을 통해 완성된다.

백수로 사는 것의 어려움

만화에는 우리의 덧없는 욕망이 있다. 거대한 로봇을 타고 힘을 소유하고픈 욕망, 멋지게 변신하고픈 욕망, 내 말이라면 꼼짝을 못 하는 최고의 미녀를 소유하는 욕망, 멋진 남성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욕망. 수없는 욕망이 만화 안에 꿈틀댄다. 그래서 만화에는 유독 ‘백수’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한번 백수로 원없이 살아봤으면 하는 소망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김용회의 <해바라기 꽃미남>은 백수로 살고 싶은 우리의 욕망에서 출발한다. ‘백수의 도’로 출중하게 무장한 기파랑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다. 기파랑은 백수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웅변한다. 친구인 도롯시(역시 백수), 멜랑(미용사)과 함께 이벤트를 끊임없이 생성한다. 이들은 결국 단행본 4권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패러디한 <애봐라 3형제>로 다시 태어난다. 신인철의 <매일 서는 남자>도 백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화였다. 그러나 연재 중간 에피소드 조절에 실패하고 백수의 도를 완성시키지 못했다.

정연식은 <또디>라는 한바닥 컬러만화를 통해 자질구레한 일상의 유머를 선보였다. <해바라기 꽃미남>에도 자질구레한 일상의 유머가 있다. 떠나보낸 여인, 아버지에 대한 사랑 같은 낭만적인 것들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궁색함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만들어간다는 진리에 충실하다. 깨기 싫은 잠에서 깨어나고, 화장실 가고, 밥 먹고, 출근하고, 눈치 보고, 몰래 인터넷 하고, 마누라 몰래 술 한잔 걸치고, 비자금 만드는 것과 같은 궁색함이 일상이다. 몰래하는 사랑, 위기의 남자와 같은 서스펜스는 애시당초 내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궁색함이 한발 앞서 서스펜스를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궁색한 일상에도 재미는 있다. <해바라기 꽃미남>은 그렇게 주장한다. 흑사리 껍데기 태몽을 꾼 어머니, 그 불안은 현실이 되어 아버지보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는 아들을 키우게 된다. 기파랑의 궁색한 일상은 문방구 앞의 오락기계에 쭈그리고 앉아 초등학생과 ‘철권’ 대결을 벌이다 아이를 때려버리고 마는, 수많은 스포츠카, 멋진 자동차, 그것도 아니면 스쿠터라도 타고 달리고 싶은 꿈을 오락실에서 풀어버리고 마는, 깻잎파 아이들에게 대항하다 집단 구타를 당해버리고 마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청출어람이 가능할까?

<해바라기 꽃미남>은 우리의 기대만큼만 나아간다. 후루야 미노루처럼 앞질러 가지 않고 내가 예상한 그만큼의 일탈과 궁색함만을 보여준다. 내가 이 만화에서 백수의 도를 느낄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오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솔직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에피소드들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영화, CF 등의 패러디다.

수많은 만화에서 무수히 반복해서 사용하는 대중문화의 패러디는 우리 만화가들이 처해 있는 척박한 현실을 반영한다. 우리 만화가들은 경험의 폭을 확장시키고 사유의 깊이를 늘려나가는 재충전의 시간을 갖지 못한다. <해바라기 꽃미남>의 작가의 말이나 후기를 보면, 밤낮 없이 피폐한 몰골로 그림을 그려대는 모습과 꼭 사달라는 작가의 부탁을 읽을 수 있다. 가슴 아프다. 재충전이 불가한 사회적 조건은 애드리브에 기댄 동어반복의 만화만을 생산하게 만든다. 그래서 <해바라기 꽃미남>을 보면, 작가가 지닌 유쾌하고 발랄한 상상력이 채 만개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김용회는 허영만의 문하생이었다. 91년에 조운학 화실에 들어갔다, 스승의 스승격인 허영만 화실로 옮겨갔다. 이후 <미스터블루>의 공모전에 당선되지만 잡지 폐간으로 연재의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인터넷 사이트에 발표한 만화가 떠 <영챔프>에 <해바라기 꽃미남>을 연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만화에서는 스승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최근 윤태호가 <야후>에 발표하고 있는 <발칙한 인생>이나 <미스터블루>에 연재했던 <수궁별곡> <혼자 자는 남편> 등과 한 형제격인 만화다. 가만 꼽아보니 허영만의 문하에서 정말 많은 작가가 탄생했다. 참 뜻 깊은 일이다. 청출어람을 기대해본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