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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에 대한 난상토론
2002-04-25

<야수들의 밤>

오시이 마모루는 철학적이다. 그의 애니메이션, 영화, 만화 모두 오락보다는 진한 철학적 질문에 경도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진화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등등. 오시이는 우리가 결코 안전하지 않고, 결코 평화롭지도 않고, 결코 선하지도 않은 인간과 야수의 중간쯤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우리의 얼굴을 어두운 거울에 비치면 야수의 이빨이 번득거리는, 반인반수일지도.

오시이 마모루가 쓴 <야수들의 밤>은 출발부터 기이한 소설이다. 소니엔터테인먼트, SPE 비주얼웍스, 가도카와 출판사 등이 합작하여 ‘블러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오시이 마모루가 소설을 직접 쓰고, 애니메이션 기획까지 맡으며 <Blood-the last vampire>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 소설, 게임을 동시 발매하는 프로젝트다. 세일러복을 입고 커다란 일본도로 뱀파이어를 도륙하는 소녀 사야의 등장만 같고, 그 밖의 내용은 독립적이다. 애니메이션은 66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기지의 흡혈귀 일당과 사야의 싸움을 그리고 있고, 소설은 69년 반전 투쟁을 벌이던 고교생 활동가 레이가 사야를 만나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게임은 2000년 도쿄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을 그리고 있다.

레이는 반전 공동 투쟁을 위한 시위에 나갔다가, 경찰에 쫓겨 낯선 골목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기묘한 살인사건을 목격한다. 한쪽 벽에 가득 뿌려진 피,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 그리고 긴 일본도를 든 소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경찰서에서 깨어난 레이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한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 자체를 의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지만,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경시청 형사라는 고토다가 찾아와 투쟁조직인 에스에르파의 학생들이 연속으로 살해당하고 있으며, 레이의 친구인 아오키가 다음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 학생들이 살해당하기 직전에, 언제나 전학을 왔다는 소녀 사야의 존재까지도 알려준다. 레이와 친구들은 고토다를 도우려 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아오키의 연락을 받고 나간 레이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기묘한 존재를 만난다. 모든 것이 끝나고 30년 뒤, 중년이 된 레이는 전철에서 여전히 소녀인 사야를 힐끗 보게 된다.

철학적인 오시이 마모루는, 소설에서도 변함이 없다. <야수들의 밤>은 <공각기동대>의 액션장면처럼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전투도 없고, <인랑>처럼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사랑의 비극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시이 마모루는 뱀파이어라는 ‘비현실적’인 존재를 만난 고교생의 정체성 혼란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집요한 질문과 분석의 난상토론장으로 독자를 몰고 간다. 엔터테인먼트 소설이 아니라, 관념 소설이라고 주장해도 될 정도다. ‘죽음의 이미지’, ‘인간에 대한 회의’, ‘살육하는 유인원’, ‘다위니즘과 인종주의’ 등에 대한 고토다와 사야의 주인인 노인과의 대화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에 대한 대화는 인간을 지치게 하지만’ 결코 회피할 수 없다.

도저한 관념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오시이 마모루의 탁월한 영상감각은 소설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대규모 시위장면이나 뱀파이어와의 대결장면은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느껴진다. <야수들의 밤>은 “그 당시 학생들은 딱 두 종류였다. 거리를 활보하며 운동에 가담하거나, 아니면 극장에 틀어박혀 있거나. 나는 둘 다 했지만”이라고 자백하는 오시이 마모루의 진기한 이력을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이다.(황금가지 펴냄) 김봉석/ 문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