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한(恨)의 정서, 이미지의 씻김굿
2001-03-23

<오스 살테아도레스>

애니메이션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나라는 대개 한정돼 있다. 미국과 일본. 유럽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 독일 외에 동구권의 몇몇 나라 정도.

이베리아반도의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경우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애니메이션 애호가들에게도 꽤 낯설다. 하긴 애니메이션이 아닌 다른 문화에서도

우리가 아는 한계는 스페인까지이다. 그 너머 포르투갈의 경우, 그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그들의

전통음악인 파도(fado)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유럽에서도 포르투갈은

경제 문화적으로 변방의 국가로 취급받고 있다.

아비 페이조(Abi Feijo)는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작가이다. 80년 디자인 전문학교인 오포르토스 스쿨을 졸업한 뒤 활발한

작가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포르투갈의 문화와 전통, 역사를 주요 소재로 삼아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페이조의 작품에는 다른 유럽 작가들과는 다른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그는 전체적으로 목탄 스케치를 연상케 하는 화면을 즐겨 사용한다.

물론 컬러 작품도 많지만, 그 작품들에서도 주제를 강조하거나 회상 등 중요한 장면에서는 흑백 모노톤의 화면을 이용한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는

지중해성 연안의 밝은 햇살보다는 달빛도 별로 없는 깊은 밤의 이미지가 강하다. 라틴 유럽 사람들이 대체로 정열적이고 낙천적이라는 우리의

선입관과는 달리 그의 작품은 모노톤의 색채만큼이나 어둡다. 문제는 이 어둠이라는 것이 북구 유럽의 겨울처럼 음습하고 침울한 암흑이 아니라,

뭔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듯한, 많은 사연이 담긴 듯한 그런 침묵의 어둠이다.

정서적인 느낌을 본다면 마치 우리 문화의 중요한 정서 중 하나인 ‘한’과 어딘가 일맥 상통한다. 실제로 그의 초기작인 (How

Calm It Is, 1985)는 이런 그의 작가적 방향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포르투갈의 전통 민요인 파도 곡 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3분8초짜리 이 작품은 모래 애니메이션, 핀 스크린, 컷아웃, 스크래치 온 필름 등 다양한 기법이 동원됐다. 그는 이

작품에서 조국의 전통음악에 흘러가는 사운드의 흐름에 영상의 시각적 흐름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이 작품은

포르투갈 문화에 담겨 있는 두려움과 공포, 환상을 지나가는 여행이다”라고 설명한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즈로 대표되는 파도를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음악은 참 구슬프다. 구성지면서도 애절한 가락은 언뜻 우리의 육자배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페이조는 그런 자신들의 민족음악이 담긴 정서를 시각적 이미지로 그리려고 했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전통문화만이 아니다. 그는 포르투갈이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겪은 질곡의 역사에 대해서도 분명한 자신의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는 (Outlaws, 1993)는 그런 경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스페인내전이 끝난 이후 프랑코주의자의 추격을 피해 국경과 인접한 북부 포르투갈의 산악지대로 도망온 공화주의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들은 때로는 산적으로 오해받아 탄압받기도 하지만, 몇몇은 포르투갈인들의 도움으로 은신처를 제공받기도 한다. 당시 프랑코 총통이

지배하던 스페인의 영향을 받고 있던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영토로 스페인 경찰이 들어와 공화주의자들을 잡아가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장하다 열강의 세력싸움 틈바구니에서 이상을 접은 이들, 사람들은 그들을 ‘무법자’(Os Salteadores)라고 불렀다.

페이조는 이 작품을 통해 어쩌면 부끄러운 과거일 수도 있는 포르투갈의 현대사를 연필 스케치의 강렬한 질감이 넘치는 화면으로 담담하게 ‘증언’하고

있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