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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AF 1호 [기획] 김초엽 에세이, 이 환상을 기꺼이 믿는다면
김초엽 2022-10-21

김초엽 에세이, 그가 바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

김초엽 | BIAF2022 국제경쟁 심사위원, 신간 에세이 <책과 우연들> 발간,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지구 끝의 온실> <행성어 서점> 등

나는 소위 ‘투니버스 세대’다. 10대 초반부터 온갖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접하며 자랐다. 그렇지만 어설프게 철든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또래들이 다들 좋다는 건 어쩐지 마음 다해 좋아할 수 없어 슬쩍 뒤로 물러나는 타입이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애니메이션에 빠져든 게 언제였더라. <월-E>였나 <라따뚜이>였나,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고등학생 때 픽사 스튜디오의 작품 하나를 보고 갑자기 멱살 잡힌 듯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한 발 늦게 끌려 들어갔던 건 분명하다. <>, <토이스토리 3>, <드래곤 길들이기>, <주먹왕 랄프>……. 보고 싶은 애니메이션 영화가 개봉하면 얼른 극장으로 달려갔다. 늘 가족 관객들 옆에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면 어린이들은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데, 나만 혼자 훌쩍거리며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앉아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10대 후반을 지나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하는 외로운 어른 관객이 된 나는, 갑자기 어른들이 단체로 <겨울왕국>을 보러 극장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당혹스러운 천지개벽을 마주하기도 하면서, 이후에도 좋아하는 스튜디오의 새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열렬한 애호가가 되었다.

SF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 종종 SF와 애니메이션의 기묘한 친연성을 생각한다. 물론 전혀 다른 분류법에 속해 있어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둘 다 ‘다른 시공간을 설정하는’ 문제를 다룬다고 할까. 애니메이션의 세계 속에서는 어떤 규칙이든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 실사 영화와 달리 현실의 제약이 거의 없는 이 세계는 무한히 다양한 우주를 허용한다. 장난감이 살아 움직이고 아케이드 게임 속 캐릭터들이 밖으로 뛰쳐 나와도 우리는 그것을 적어도 이야기의 세계 안에서 신뢰한다. SF도 비슷하다. 말도 안되는 기괴한 행성이 등장하고,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가며, 때로는 엔트로피 법칙이 뒤집혀도 이 제한된 놀이터 위에서는 어쨌든 모두 괜찮다. 그렇지만 그게 어떤 일이든 마구 개연성 없이 벌어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놀이터가 정해지고 규칙이 설정되면, 이야기는 그 규칙을 따르며 전개된다. 아주 이상한 규칙마저 허용되는 새로운 시공간이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과 오가는 말과 생겨나는 감정들은 어쩐지 정말로 ‘있을 법’하다. 이쪽 현실 우주에도 손가락 끝 정도는 걸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우리는 화면 속 장난감과 청소로봇과 돌멩이들이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에게 마음을 준다. 그리고 끝내 그 환상을 진실로 믿고 싶어진다.

다시 돌아온 이 현실 우주는 시시하게도 장난감이 말하지도 않고 못생긴 괴물들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지도 않는 지극히 평범한 우주다. 그런데도 나는 어쩐지 예전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이 현실을, 일상을 보게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나는 장난감이 살아 움직인다고 믿기에는 너무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얼마 전, 양자경이 무한한 평행우주를 오가며 연기 대활약을 펼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봤다. 이 영화에는 정말로 다양한 평행우주가 등장하는데, <라따뚜이>의 생쥐가 아니라 라쿤이 정체를 숨긴 채 몰래 요리사 일을 하는 ‘라따구리’ 평행우주, 핫도그 소시지 손가락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는 이상한 평행우주도 등장한다. 그 우주의 모든 장면이 정말 헛웃음 나올 정도로 어이없었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소시지 손가락을 휘두르는 사람들과 라따구리를 보면서 울고 있었다. 왜 저 황당한 존재들은 이 세계에서만큼은 정말로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엉뚱한 우주는 이 우주에서 아주 아주 멀리 뻗어나간 먼 가지 끝에 있겠지만, 그럼에도 분명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게 아닐까. 멀리 멀리 가다보면 그런 우주도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가장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그 우주가, 실은 우리 우주와도 느슨히 이어져 있었다면. 그 생각을 하면 어쩐지 나는 조금 행복해진다.

낯설고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그리하여 다른 시공간으로 여행을 떠나게 하는, 그리고 다시 돌아와 우리의 우주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환상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역시 다채로운 환상을 품고 발견하고 공유하는 축제의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 수많은 환상 속에, 어딘가 당신이 오래 머물고 싶은 우주도 하나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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