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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JU IFF #3호 [인터뷰] '밤 산책' 손구용 감독, 풍경이 나를 찾아오는 경험
임수연 사진 백종헌 2023-04-29

<밤 산책> 손구용 감독

어떤 관객은 영사 사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밤 산책>은 어떤 소리도 없이 도시와 숲, 골목길과 개울, 도시와 자연의 정적 풍경을 산책하듯 이어 붙인다. 여기에 손구용 감독이 직접 그린 드로잉과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가 끼어들어 독특한 정취가 만들어진다. 전작 <오후 풍경>도 도시의 풍경을 포착한 작품이지만 <밤 산책>에선 행인의 움직임까지 덜어내 종종 영화 전체가 사진 이미지의 연속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올해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하버 부문에 초청된 <밤 산책>을 연출한 손구용 감독을 만나 그의 실험적인 다큐멘터리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올초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됐다. 상영 당시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었나.

= 꽤 큰 극장에 관객이 만석이었다. 그런데 무성 영화라 그런지 사람들이 영화를 보다가 기침을 많이 하더라. (웃음) 중간에 코를 고는 사람도 있어서 맨 뒷자리에서 초조하게 지켜봤다. 그런데 막상 관객과의 대화(GV) 때는 질문이 많이 나왔다. 그중 어떤 분이 영화에 나오는 달이 계절의 경과를 보여줘서 함께 산책하는 느낌이 들었다는 감상을 전해 주셨다. 사실 시간순대로 찍은 영화는 아니다. 대신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시구를 중간중간 의도적으로 넣긴 했다. 전반적인 톤이 어두워서 진짜 달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는데, 아마 그분은 달빛이 주는 어떠한 정취를 느낀 것 같다.

- 어떻게 출발한 작품인지 궁금하다.

= 첫 장편 영화 <오후 풍경>을 찍고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서울의 홍제동이나 세검정 마을 그리고 근처 동네에 아직 남아 있는 옛 정취와 특유의 여름 오후의 빛깔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충분히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오후는 햇빛에 만물이 물드는 시간인 데 반해 밤은 오랫동안 보아야 아주 작은 빛이 눈에 들어온다. <오후 풍경>의 로케이션 중 하나이기도 했던 세검정 마을에 홍제천으로 이어지는 작은 개울가가 있다. 우연히 그곳에서 밤 산책을 하다가 사물과 풍경이 한순간 푸른빛으로 감응되는 미적이고 공감각적인 경험을 했다. 그래서 세검정 마을로 로케이션을 좁혀 깊이 파고드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오래 갖고 5~6개월 동안 마을을 찍었다.

- 유독 세검정 마을이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밤이 되면 마치 마을에 비치는 불빛이 별처럼 보이고, 북악산 끝자락이 맞닿아 있어 산과 물과 동네가 함께 어우러진 듯한 곳이다. 앞서 말한 개울 속을 들여다봤을 때 환상일 수도 망상일 수도 있는 경험을 했다. 마치 물과 하늘이 하나가 되고 이를 보는 나 자신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 개울가를 꼭 영화에 담고 싶었다.

-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는 어떻게 선별한 것인가.

= 원래 동양 철학과 성리학에 흥미가 있었다. <밤 산책>을 촬영할 때 읽던 문집이 있었다. 달과 별, 밤, 꿈같은 주제로 쓴 한시가 굉장히 많았는데 내가 촬영하고 있는 세검정 마을과 잘 어우러졌다. 그래서 직접 쓴 글보다는 시를 차용해서 쓰는 게 더 어울리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원래 시 구절을 발췌해 그림의 정취를 표현하는 문인화 형식에 관심이 많았다. 풍경화를 영화적 형식으로 만들 때 문인화의 구성을 가져오면 적합할 것 같다는 판단도 있었다.

- 어떤 장소를 어떤 방식으로 찍을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나.

= 초창기 때 시나리오가 있고 배우들이 나오는 단편 영화를 찍은 적도 있다. 그런데 정해진 예산에 쫓기면서 촬영하는 게 맞지 않아서 짜여진 틀을 버리고 버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오후 풍경>에는 배우가 한 명 있었지만 <밤 산책>은 그마저도 없이 혼자 찍었다. 긴 시간 동안 여유 있게 풍경을 보고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그러자 시나리오를 들고 찍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능동적으로 이미지를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풍경과 사물이 나를 찾아오는 것 같았다.

- 나중에 소리를 없앤 이유는 무엇인가.

= 촬영할 때는 사운드를 따로 녹음할 정도로 공을 들였는데, 편집 과정에서 그 소리들이 계속 거슬렸다. 내가 느꼈던 감각이 무뎌지고 반감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우연히 사운드를 없애고 오로지 내가 찍은 이미지와 드로잉, 글만 봤는데 오히려 감흥이 더 커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나중에 소리를 없앴다.

- 대학 학부에선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어쩌다 영화감독으로 진로를 틀게 됐나.

=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영상 매체에도 관심이 많았다. 방송 PD나 광고 쪽에도 약간 관심이 있어서 선택한 전공이었다. 그러다 군대에 갔다 온 후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돌이켜봤다. 역시 예체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부 막바지 때부터 사진을 독학으로 공부해 3~4년 정도 열심히 찍었다. 그런데 사진 매체에는 어떤 순간만 담겨 있고 축적되는 시간성이 없어서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보다 사진이 어려운 작업일 수도 있다. 영화 매체는 숏과 숏이 이어질 때 회화에서 붓질이 더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시공간이 존재한다. 그 여백을 활용하면 내가 느꼈던 감흥을 삼차원적으로 풀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시카고예술대학 영화영상뉴미디어 석사 과정을 밟을 땐 어떤 것을 배웠는지.

= 학부 졸업 후 단편 영화 <산책> <서울의 겨울>을 작업했다. 원래 실험영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사진 작업의 영향 때문인지 내가 찍는 작품들이 서사성보다는 이미지와 사운드 위주로 흘러갔다. 영화학교 중에서도 시카코예술대학이 실험영화나 뉴미디어처럼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많이 수용하는 곳에 속한다. 그래서 비영화적인 영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졸업 작품 <오후 풍경>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분들과 나눈 대화 덕분에 작품도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 앞으로도 <밤 산책> 같은 작업을 이어갈 예정인가.

= 서사가 희미하고 정서나 감흥을 더 불러일으키는 서정시나 풍경화에 더 마음이 간다. 다소 나이브한 말일 수도 있지만 풍경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많은 영화들이 대체로 역사적, 정치적 맥락보다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관찰을 토대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그것조차 빼고 어떤 서정만 다루고 싶다. 스토리가 개입된 영화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은 아직 내게 부족한 것 같다. 당분간은 서사를 빼고 단순화한 작업을 이어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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