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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회 칸국제영화제 중간 결산
임수연 취재지원 최현정(파리 통신원) 2022-06-02

시네마는 여전히 살아 있다

어느덧 중반을 넘어선 제75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 칸을 찾은 기자들은 경쟁부문에 초청된 감독들의 네임 밸류에 비해 작품이 전반적으로 심심하다는 아쉬움을 털어놨지만, 영화제 공식 소식지 <스크린 데일리>에서 최고 평점(3.2점)을 기록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다시 달아올랐다. 경쟁부문 후보작 21편 중 16편이 공개된 지금, <씨네21>이 향후 영화제의 선택을 점치는 기사를 준비했다. 올해 한국영화 초청작만 4편에 이르는 만큼 칸에서 만난 영화인도 다양했다.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 배우 탕웨이·박해일,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서 최초 공개된 <헌트>의 이정재 감독과의 인터뷰를 전한다. 경쟁부문 화제작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의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과 <R.M.N.>의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과의 만남은 올해 경쟁부문 분위기를 점칠 수 있는 요긴한 기사가 될 것이다.

<헌트>의 이정재, 정우성 (왼쪽부터).

“Stop raping us!”(우리를 강간하지 마라) 조지 밀러 감독의 신작 <3천년의 기다림>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앞둔 5월24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국기 문양으로 보디페인팅을 한 여성이 레드 카펫에 섰다. 그는 프랑스 페미니스트 단체 SCUM 소속 활동가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여성에게 가한 성폭력을 규탄하기 위해 페스티벌을 찾았다. 그의 행동은 현장에서 즉각 제지됐지만 페미니스트 활동가의 시위는 칸영화제를 찾은 전세계 기자들에게 큰 화제가 됐다. 23일에는 스페셜 스크리닝 부문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페미니스트 리포스트>(감독 마리 페레네스, 시몬 드파르동)팀이 여성 혐오 살인의 피해자 이름을 새긴 배너를 들고 레드 카펫을 걷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올해 칸영화제가 정치 이슈를 공론화할 수 있는 무대로 부각되는 것은 어쩌면 개막 이전부터 예고됐는지도 모른다. 칸영화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보여줘야 하는 시기에 개최됐다. 영화제 시작 전 칸영화제측은 러시아 대표단 및 친푸틴 성향의 기자들의 출입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개막식날 화상으로 참석해 영화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깜짝 연설을 전했다.

제임스 그레이와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선전

<크라임스 오브 더 퓨처>

<토리와 로키타>

반전과 페미니즘의 직접적인 메시지만이 정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3년 만에 정상화를 꿈꾸는 칸영화제는 다층적인 차원에서 그들의 입장을 표명하고 변화를 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극장 내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지 않고 온라인 티케팅 시스템을 도입한 영화제(초반에는 서버 접속이 원활하지 않아 전세계 프레스의 원성을 사긴 했지만)는 계급화를 조장한다는 고질적인 문제로 비판받았던 복장 규정을 비공식적으로 완화했다. 관객은 물론 사진기자들까지 턱시도와 보타이, 굽 있는 구두와 드레스 등 격식을 갖춘 의상을 요구했던 뤼미에르 극장은 청바지에 가벼운 샌들을 신은 관객에게도 입장을 허락했다. 젊은 신인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던, 콧대 높은 경쟁부문의 문턱도 낮추었다. 프랑스의 문화 주간지 <텔레라마>는 “난니 모레티나 테런스 맬릭 같은 단골 감독들은 더이상 뉴스거리가 안된다. 영화제는 진화해야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라며 올해 두 번째 장편영화로 경쟁부문에 입성한 루카스 돈트레오노르 세라이예에 주목했다.

특히 올해 경쟁부문은 감독의 출신 국가부터 장르, 소재와 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밸런스를 고려한 작품 선정을 보여줬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제의 존폐 위기가 거론되는 지금 영화제의 존재 의미를 증명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올해 경쟁부문 상영작은 총 21편으로, 5월25일(현지 시각 기준)까지 16편의 작품이 공개됐다. 여기엔 이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형제, 크리스티안 문쥬, 루벤 외스틀룬드 그리고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박찬욱, 클레르 드니 등 거장 감독과 세 번째 장편영화를 찍은 이란 출신의 알리 압바시가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 대표단의 참석은 금지됐지만, 러시아의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혀 수년간 가택 연금됐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신작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스웨덴계 이집트인 타릭 살레 감독의 <보이 프롬 헤븐>은 정치와 종교가 무관하지 않은 국가에서 지도자(이 영화에서는 이맘, 이슬람교 교단 조직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하나의 직명이다)를 선정하는 비민주적인 절차를 묘사한다.

제임스 그레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아마겟돈 타임>은 지금까지 공개된 작품 중 가장 유력한 황금종려상 후보 중 하나다. 1980년 뉴욕 퀸스, 레이건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고 10살 소년 폴(뱅크스 레페타)은 예술가가 되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이나 가족들은 수업 과제와 관련 없고 반짝이는 독창성도 발견할 수 없는 그의 그림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공립학교에서 만나 그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조니(제일린 웹)만이 그의 사정을 이해해주는데, 둘의 만남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폴이 가족 내 학대의 피해자이자 학교에서 무시당하는 부적응자라는 설정은 혜택받은 계급에 있는 자들이 가질 수 있는 편견과 한계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폴의 성장통은 중산층이 되기를 꿈꾸는 유대인 이민자 집단에 속한 자신과 계급 상승의 가능성조차 없는 흑인 친구의 계급 차를 인지하면서 시작된다. 대중적인 화법으로 차별의 다층적인 구조를 성찰한 드라마로, 이는 1980년대 미국뿐만 아니라 동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유효한 시각이다.

<경계선>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고 세 번째 장편영화로 경쟁부문에 입성한 알리 압바시의 신작 <홀리 스파이더>는 이란 내 여성 혐오를 날카롭게 포착했다는 호평과 더불어 기대 이하라는 혹평을 동시에 받고 있다. 매춘부를 대상으로 한 이란의 실제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진실을 추적하는 여성 저널리스트의 진득한 추적을 그린다. 프랑스 문화 주간지 <텔레라마>는 “문제는 감독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 어떤 충격효과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하는 여성의 클로즈업으로 그가 느끼는 고통을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두번, 세번 반복될수록 감독 자신이 폭력의 스펙터클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새로운 시도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은 84살의 최고령 감독 예지 스콜리모프스키가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를 재해석한 영화 <EO>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새로운 형태, 화려한 색채, 모험 가득한 장면, 지각을 자극하는 여러 실험”을 언급하며 노장의 과감한 도전에 대해 호평했다.

논쟁적인 수위를 경고하는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감독의 인터뷰로 화제를 모았던 <크라임스 오브 더 퓨처>가 상영될 때, 내심 사람들이 기대했을 구토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관객을 보다 당황시킨 것은 79살의 그가 1980~90년대 집중적으로 탐구해왔던 세계로 돌아가 쉽지 않은 뚝심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비디오드롬> <엑시스텐즈> <더 플라이> <크래쉬> 등 기술의 진보 이후 인간과 기계의 포스트휴먼적인 결합과 새로운 섹슈얼리티를 영화 이미지로 구현해 온 크로넌버그는 이번 작품에서 신체가 새로운 돌연변이를 겪는 선진 사회를 예언한다. 합성 기술의 발달로 신체의 소유와 통제가 가능해진다면 제목 그대로 미래의 범죄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난해한 스토리와 늘어지는 연출로 현지에서 반응은 엇갈리고 있지만, 크로넌버그 영화가 언제나 그래왔듯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크라임스 오브 더 퓨처>가 차지하는 자리는 근미래에 비로소 판가름날 듯하다.

다르덴 형제는 세 번째 황금종려상을 품에 안을 수 있을까. 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의 카메라는 <토리와 로키타>에서 거주 증명서를 얻고 벨기에에 정착하기 위해 분투하는 아프리카 이민자 남매의 등을 따라간다. 프랑스 일간지 <레 제코>는 “절제와 신중함으로 이 끔찍한 이야기를 귀감이 될 만한 비극으로 만들었다. 심사위원단은 이 위대한 영화에 둔감할 수 없을 것이며, 황금종려상을 안겨줄지도 모른다”고 호평했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다루는 반복적인 소재와 태도를 문제삼는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 같은 평론가는 “이 작품은 기이하게 형식적인 ‘곤봉’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결말 자체는 비록 취약한 이민자들을 착취하는 무자비함을 암시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방식이 너무 순진하다”고 지적했다.

혼돈의 시대 , 영화제의 존재 의미

<헤어질 결심>의 탕웨이, 박찬욱, 박해일 (왼쪽부터).

26일 오전 기준 칸영화제 공식 데일리지에서 가장 높은 평점을 기록한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다. <헤어질 결심>은 영미권 공식 소식지인 <스크린 데일리>에서 3.2점을 기록하며 지금까지 공개된 16편의 영화 중 유일한 3점대를 기록했다(<헤어질 결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박찬욱 감독, 배우 탕웨이·박해일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어느 때보다 정치적 이슈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영화제가 <헤어질 결심>을 주목하는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점이다. 외신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박찬욱 감독 하면 떠오르는 수위 높은 폭력과 섹스가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인터넷 비평 사이트 <시네마 티저>는 “폭력적이고 관능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이상하게도 순결하고 플라토닉적이며 때로는 나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평했다. 또한 “매혹적이고 독선적인 네오 누아르”(<스크린 인터내셔널>)라든지 “유머와 우울함이 가득한 박찬욱 연출력의 정점”(<버라이어티>)이라는 반응은 영화가 담고 있는 사회적 함의보다 장르와 연출에 집중하는데, 이는 정치적 이슈와 함께 출발하며 당초 예상했던 칸영화제의 경향과는 맥을 달리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색깔이 짙은 영화와 영화미학 본연의 가치에 치중한 영화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행태도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정치는 사회문제를 겨냥한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는 작업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다. 장르영화의 입지를 견고히 하거나 영화를 영화이게 만드는 조건에 대해 성찰하는 일이 어떻게 정치와 무관할 수 있을까.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칸영화제 75주년 행사에 참석해 “시네마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과거로 가기를 원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볼 것이다. 우리는 팬데믹이 끝난 후 시네마가 우리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싸워야 한다. 시네마는 여전히 살아 있다.” 칸영화제 규칙 제1조에 명시된 설립 약속이 “우정과 보편적 협력의 정신으로 영화예술의 진화를 위해 양질의 영화를 공개하고 선보이는 것”이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올해 칸영화제가 어떤 작품에 손을 들어주든, 그것은 혼돈의 시기에 가장 상징적인 영화제가 보여줄 수 있는 자세로 해석될 것이다. 폭력과 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형태든, 장르와 상업성에 대한 고민이든, 팬데믹과 스트리밍 서비스의 성장으로 극장영화가 위기를 맞은 시대에 시네마의 정의를 고집스럽게 내리는 방식이든 어느 쪽이어도 의미가 있다. 영화제 후반에는 알베르 세라의 <퍼시픽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브로커>,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 켈리 라이카트의 <쇼잉 업>, 레오노르 세라이예의 <마더 앤드 선>이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다. 이중 특히 언론의 관심을 모으는 작품은 <브로커> <클로즈> <쇼잉 업>이며 <브로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클로즈>의 루카스 돈트 인터뷰는 차주 본지에 실릴 예정이다. 75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수상 결과는 오는 29일 폐막식에서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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