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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오! 컬트 <마이크로 코스모스> <위대한 비상>
2002-05-29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철새들은 대체 무슨 운명으로 계절마다 그렇게 멀고 고단한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일까? 수백 킬로미터에서 멀게는 수천 킬로미터까지 해마다 이동해야 하는 운명이 철새들의 일생이다. 나는 자연의 섭리라고 이름 지어진 채 끝없이 반복되어지는 풍경이 너무나 괴롭다. 경이롭고 위대해 보이기보다 고통스러운 고행의 반복으로만 보여진다. 철새들의 운명이여. 일개미의 운명이여. 꿀벌들의 희생이여. 이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슬픈 운명이다. 당신은 싸우다가 죽어갈 병정 개미, 당신은 새끼에게 제 몸을 뜯어먹히는 거미. 혹은 흙이나 파먹고 살 지렁이의 운명이나 아니면 뿌리내린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모든 계절의 고통을 고스란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식물들의 운명 중 하나와 닮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정작 목숨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왜 사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당신은 언제나 산들바람이 부는 푸른 언덕의 싱싱한 꽃나무의 운명이라서 행복하기 그지없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따뜻한 해수면에 넘실대는 한 포기 물풀의 운명과도 같아서 그 어떤 삶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무슨 이유로 태어나서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순간 고통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 자아의 발견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가령, 철새가 길 떠나기를 거부하고 다른 방법으로 정착을 시도한다면? 일개미들이 사회적 동물이기를 거부하고 개미사회를 떠난다면? 나무들이 겨울이 오면 남쪽나라로 이동하고자 한다면? 정말 이런 일이 한두 가지라도 가능하기만 하다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행복하게 살고자 했던 욕망은 결국 모든 생태계를 멸종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어이 그런 자아중심적인 생존방식을 선택한 생물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인간이다. 겨울잠을 자거나 털갈이를 하는 식으로 생체적으로 겨울에 적응하는 고통스러운 방식 대신 불을 피워서 추위 자체를 막아버리듯이, 수없이 많은 도구와 기술과 변용으로 자연의 섭리에서부터 발생되는 고통의 요소들과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생존방식으로부터 발생되는 모든 부작용은 자연의 섭리에 그야말로 ‘스스로 그러하게’ 따르며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떠안으며 고통받거나 생존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새들의 비행이 그러하고 물고기의 유선형의 체형이 그러하고 딱정벌레의 더듬이가 그러하고 모든 잎과 뿌리들이 그러하고 태어나고 자라나고 번식하고 죽어가는 반복과정 자체가 그러하다. 그 언젠가 생명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그 어떤 곳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새로 태어난 개체에게 유전자를 넘겨주기를 끝없이 반복하면서 생존의 이어달리기가 그 어떤 지점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생명체의 생존 이유는 한 개체의 행복하고 안락한 일생을 완성하는 데 있지 않은 것인가보다. 어쩌면 생존이란 유전자의 레이스. 하나하나의 개체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전해받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해주면 그 생의 임무는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들은 그렇게 먼 길을 약속대로 날아가기를 거부하지 않는가보다. 일개미는 일개미로 소모되기를 주저하지 않는가보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자아라는 원죄를 가진 존재 인간이다. 일개미로 살 수는 없다. 내 인생이 등 따시고 배부른 날들로 채워진다고 해도 만족할 수 없다. 내 자아의 욕심은 생명체의 집요하고도 거대한 생존의 행진이 향하고 있는 그곳. 혹은 그때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내 삶이 짧아서 안타까운 이유가 있다면 내가 그 행진의 피날레를 체험할 마지막 주자가 아니란 것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아아…. 진실로 진실로, 모든 생명이 향하고 있는, 거기에 이르고 싶다. 그 생명 레이스의 피날레를 볼 수만 있다면, 겨울이 올 때마다 1만2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철새로 5천년 동안 살아도 좋다.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리더 http://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