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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관찰에서 웃음 끌어내는 시트콤 <동물원 사람들>
2002-05-29

사소함과 견고함

(KBS2TV 월∼금 저녁 7시45분)

시트콤은 클리셰의 집합이 되었다. <잘난 걸 어떡해>(KBS2TV, 종영)에서 스포츠센터 아가씨들이 말 잘하는 사람에게 속아서 다이어트 용품을 사는 이야기(1월29일)가 방영된 다음날(1월30일) <뉴 논스톱>(MBC 월∼금 6시50분)에서 ‘어리버리’ 장나라가 말 잘하는 사람에게 속아서 필요없는 상품을 사는 에피소드가 방송되었다. 결말도 둘다 물건을 잘 샀다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연일 방송되었으니 베끼지는 않았을 테다. 시트콤은 더듬이를 서로 맞대 기억을 복사하는 개미의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첫 장면을 보았다면 전개가 빤하다. 소중한 것이 등장하면 꼭 그 물건은 누군가가 잠깐 쓰다가 없어져서 소동이 벌어지고, 누구에게 용감하게 보이고 싶으면 희롱하는 남자와 여자라는, 그리고 자기는 그를 구해주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전술을 짠다. 친구들 사이에 거짓말이 빈발한다. 어떻게 친구 사이가 유지되나 의문스러워지는 악수를 두면서도 시트콤은 건재하다.

그래서 시트콤은 정말 편리한 장르같이 보인다. 아이디어 공모가 일반화되어 있고, 네티즌들이 올리는 줄거리들은 방영분에 버금가는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시트콤은 사소한 장르라는 것. 일일극보다도 사소하다면 더 사소하다는 것. 매일매일의 일상사를 견뎌내야 하므로 견고한 장르라는 것. 그리고 그 사소함과 견고함은 인간에 대한 지독한 관찰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사마다 하나씩의 일일 시트콤이 방영되는 때에 시트콤 불황을 이야기한다. 그런 중에 희망 하나를 건진다. <동물원 사람들>이다. 이 시트콤은 불모지에서 나왔다.

따져보면 한국 시트콤의 역사에서 걸출한 시트콤은 불모지에서 나왔다. <남자 셋 여자 셋>은 청춘 시트콤이라는 말을 프로그램 앞에 붙이고 스타없이 출발했다. 지금 <남자 셋 여자 셋>은 시트콤의 전형이 되었다. <세 친구>는 성인들 대상으로 밤 시간대를 포진했다. 세명의 남자는 그 이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남자들이었다. <순풍 산부인과>는 일일드라마 다음, 미니시리즈 전이라는 ‘끼인’ 지역에서 출발했다. 6개월 동안 그 화법에 사람들이 낯설어했다. 그리고 <동물원 사람들>. KBS는 지금까지 한번도 시트콤이라는 장르에서 피치를 올린 적이 없다. <동물원 사람들>의 전작 <잘난 걸 어떡해>는 4개월 만에 종방되었다. 3월11일 시작한 이 시트콤은 지금 한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동물원 사람들>은 훌륭하다. 술자리에서 공중에 들어올린 소주잔이 1초간 머무르는 순간, 갑자기 카메라가 원을 그리면서 그 소주잔을 관찰하는 순간, 음악은 띠리리∼라는 깨달음이 묻어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묻어나는 순간의 포착

<동물원 사람들>은 동물원과 동물병원이 주요한 장소다. 동물원 가까이에 동물원장 고대식(전무송)과 그의 아들 한길(김찬우·동물병원 원장), 두길(심지호·동물원 사육사) 그리고 프랑스에 부인을 보내고 집안일을 하는 고대식의 동생 현식(천호진)과 그의 딸 미나(정화영)의 집이 있고, 그 집 옆에 동물원 주임 정운종(정성모)과 그의 부인 양하영(김현주), 부부의 아들 민호(<순풍 산부인과>의 정배), 하영의 동생 민영(이민영·동물병원 의사)의 집이 있다. 동물병원에는 한길과 민영 외에도 정성화가 의사로 김재인이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고대식은 위치로는 <순풍 산부인과>의 오지명에 비교될 만한 인물이다. 하지만 대식에게는 코미디적인 면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가식적인 사람이란 면에서 장진구(<아줌마>)와도 흡사하다. 하지만 밉지 않다. 비슷하지만 독자적인 아우라를 완성한다는 면에서는 전무송의 연기가 한몫할 것이다. ‘사랑과 용서’라는 가훈을 걸었다가 그럴듯한 얼굴로 ‘철저한 자기 관리’로 가훈을 바꾼 뒤, 궁지에 몰리자 ‘사랑과 용서’라는 가훈을 바꿔 달 때의 얼굴에는 일파만파의 인간적인 이기심, 욕심, 권위, 부끄러움이 스쳐 지나간다.

양하영은 평균적인 젊은 아줌마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면에서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시어머니를 봉양하지도 친정어머니와 패거리를 형성하지도 않으면서 통닭집에서 일하는, 드라마에서는 흔치 않지만 현실에서는 일반적인 아줌마다. 현식과 퀴즈쇼에 출연하고서는 상품을 타자 모두 자기가 가진다. 현식이 보다 못해 상품을 자기가 갖겠다는 각서를 비디오에 녹음하지만 하영은 그것을 편집한다. 그러고는 말한다. “제가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아직까지 틀이 덜 잡힌 캐릭터도 있다. 비슷한 또래의 현식과 운종은 독자적인 성격을 탑재했지만 <순풍 산부인과>의 영규의 소시민적 성격을 나눠 가졌다. 현식은 잡기에 능하고 운종은 절대로 돈을 내지 않는다. 하지만 승부욕 강하고 계획적인 현식이 공짜로 음식을 얻어먹을 궁리를 하는 에피소드와 운종이 임기응변으로 자신의 잘못을 덮어 나가는 에피소드에 이르면 둘의 성격이 헷갈릴 때도 있다.

민영과 한길은 <동물원 사람들>의 드라마 라인을 지키고 있다. 둘은 모두가 의심하는 연인이다. 한 에피소드에서는 사진사가 찾아와 둘의 사진을 찍고, 한 에피소드에서는 둘이 같이 밤을 샜다고 의심받는다. 민영의 옛 남자가 찾아왔을 때 한길을 남자친구라고 속이는 바람에 결혼식까지 치르게 된다. 민영을 짝사랑하는 성화와 한길을 짝사랑하는 재인은 둘의 사이를 항상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둘은 긴긴 세월을 친구 사이로 지내왔다. 그런데 급기야 스스로도 서로의 관계에 대해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후 한길과 민영 사이는 핑크빛으로 채색된다.

<동물원 사람들>에서 지금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펼쳐지는 것은 민호와 미나 사이다. 민호는 미나를 속이고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간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민호가 미나에게 원반을 던지며 화해를 청할 때 미나의 눈물이 그득하던 눈에는 웃음이 번져 나간다(이후 전개에서 이 사랑은 더욱 더 안타까움을 자아낼 것으로 보인다. 한길과 민영의 사랑이 맺어지게 되면 둘은 사돈관계가 된다. 바뀐 가족법에 따르면 사돈은 친척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은 근친상간). 왈왈 동물병원의 병아리 치사사건은 그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그들은 친구들을 모아 데모대를 조직한다. 이 사건에서도 유희는 볼 수 없었다. 어린이가 어른들의 세계를 모방함으로써 그 세계를 낯설게 하는 것을 넘어, 이것을 어린이 권리선언쯤으로 읽어도 될 듯하다.

시트콤, 즐거움을 위해 혹사당하는 장르

일일시트콤은 먼먼 아프리카에서 잡혀와 인간들의 눈에 신기할 목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원 동물의 운명과 비슷하다. 헌신적이고 기특하다.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혹사당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노동강도로 시트콤은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동물원 사람들>의 조건은 더 열악하다. 방영 시간도 길다(그래서 인물도 많아졌다). 보통의 시트콤이 30분인 데 비해 35분이다. CM을 빼면 30분이 실질적인 방영시간. 주병대 PD는 “보통 시트콤은 메인이 70%, 서브가 30% 가면 되는데, <동물원 사람들>은 메인, 서브 없이 둘이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두 가지 이야기에 새끼를 친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똬리를 틀기도 한다. “일일드라마의 경우 시간이 되면 거기서 스톱하면 되지만 시트콤은 계산을 해야 한다. 엔딩에서 계산해서 앞으로 간다. 시간이 길다보니 가끔 반복해서 보여주고 필요없는 이야기가 끼어드는 경우도 있다.” 장소도 넓고 많다. 동물원 촬영이 일주일에 하루 있다. 병원, 동물원 원장, 대식 집, 운종 집 등으로 많아서 한 세트에 다 못 짓기 때문에 세트 촬영도 이틀에 걸쳐진다.

<동물원 사람들>은 동물원에서 죽어간 동물을 기리는 동물 위령제, 기린 이름 짓기 등 동물원의 스케줄에 맞춰서 이야기를 짜기도 한다. 동물의 내레이션이 끼어드는 일이 많다. 철창에 갇힌 동물들이 인간을 구경하는 것이 내레이션의 주요한 목적일 텐데 이 ‘환기’는 때로 너무 지나쳐 이야기를 잇기보다 맥을 끊어놓는다. <순풍 산부인과>가 인간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철학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었지만, 산부인과라는 장소에 목 매달지 않았듯이 <동물원 사람들> 역시 그런 강박을 벗어던져도 될 듯하다. 그런 동물이 바라보는 인간의 희화가 없어도 이 시트콤은 충분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주병대 PD도 말한다. “동물을 다룬다는 것이 발목을 잡았다. 동물원이 배경이므로 동물을 많이 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타잔 만들기’를 원하는 것 같은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친구의 이야기가 재밌으면 된다. 배경에 의지하고 싶지는 않다.” 1회보다 다음회가 더 재미있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일일시트콤 시청자들에게는 말 그대로의 ‘삶의 보람’이다. 글·사진 구둘래 kuskus@dreamx.net

▶ 일상의 관찰에서 웃음 끌어내는 <동물원 사람들>

▶ <동물원 사람들> 주병대 PD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