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오늘은 SF
[이경희의 오늘은 SF] 결국 우리는 닮아가고
이경희(SF 작가) 2022-09-15

<디스트릭트 9>

이상하게도 나는 외계인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곤 한다. 어릴 적부터 귀신의 존재는 죽어도 안 믿었지만(제사를 없애자!), 외계인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굳게 믿어왔다. UFO 한번만 볼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늘에 작은 점 하나만 보여도 혹시 UFO가 아닐까 뚫어져라 노려보곤 했다.

그러다보니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감상할 때면 몰입감이 남다르다. <컨저링>을 볼 땐 무덤덤한 표정으로 극장을 빠져나왔는데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상영시간 내내 오들오들 떨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여보님이 “왁!” 하는 소리에 자지러져 놀림을 받기까지 했다. KBS 토요명화로 <에이리언>을 처음 봤을 땐 정말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무서웠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엑스파일> 에피소드는 부모님과 함께 시청하거나, 혹은 비디오로 녹화해서 낮에 봤다. 어휴, 살짝 과장을 섞긴 했지만 무서운 건 정말이다. 엄살이 아니다.

지난 연재에서 곽재식 작가님이 <V>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 곽 작가님도 그렇겠지만 나는 <V>를 실시간으로 시청한 세대는 아니다. 다만 작품이 워낙 오랜 기간 회자되다보니 보지 않고도 마치 본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있다. 쥐를 잡아먹는 금발 미녀, 사람 껍질을 뒤집어쓴 파충류 외계인, 파충류 아기를 출산하는 장면 등을 예능 프로그램 자료화면으로 여러 번 접하기도 했고. 그보다 앞선 시기의 작품인 <E.T.>나 <미지와의 조우> <에이리언>도 내 시대의 영화라 보기는 어렵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 사람들에게 외계인 영화라고 하면 아마도 <인디펜던스 데이>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 싶다. 제목 그대로 미국 독립기념일에 쳐들어온 외계 군단과 맞서 싸우는 미군이 대충 컴퓨터 바이러스를 UFO에 설치해 무찌른다는 황당무계한 줄거리의 영화인데, 의외로 꽤 재미있어서 지금도 가끔 다시 찾아보곤 한다. 미국 대통령이 직접 전투기를 몰고 싸우는 장면은 좀 너무한 것 같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맨 인 블랙>을 먼저 떠올리는 분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외계인 영화라기보단 바퀴벌레 영화였기 때문에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아무래도 당시는 노스트라다무스 종말론과 엮어 1999년에 외계인이 침공한다는 이야기가 나돌던 시기였어서, 평화보다는 외계인과의 전쟁을 소재로 한 콘텐츠들이 주로 쏟아졌다. 이런 이야기들에 영감을 받은 게임도 많이 즐겼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엑스컴>을 좋아했었다.

<엑스컴>은 그간의 외계인 음모론 클리셰를 집대성한 전략 게임이다. 게이머는 지구방위대 XCOM의 사령관이 되어 UFO를 격추하고, 추락 지점에 특수부대를 파견해 외계인을 소탕해야 한다. 운이 좋으면 기절한 외계인을 생포하기도 하고. 이 게임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생포한 외계인을 연구하는 파트다. 게이머는 잡아온 외계인을 잔혹하게 실험하고 고문하고 해부해 그들의 특성을 알아내고 지식과 기술을 훔친다. ‘외계인 고문’ 밈의 원조인 셈이다. 그렇게 얻어낸 외계 문명의 기술로 인류는 전투기를 개량하고 새로운 무기를 개발한다. 적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점점 그들과 닮은 모습이 되어간다.

이 고전 게임 시리즈는 2010년대 들어 다시 리메이크되었는데, 리메이크 시리즈 2편의 설정이 꽤 흥미롭다. 주인공 사령관이 지금껏 외계인을 물리쳐온 일들은 모두 가상현실 기계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 바깥세상에서 인류는 이미 외계의 침공자들에게 항복한 지 오래다. 하지만 세계는 의외로 평화롭다. 외계인들은 평화의 사절을 자칭하며 지구상의 모든 질병과 고통을 없애줄 획기적인 유전자 치료법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뒤에서는 끔찍한 음모도 진행되고 있지만. 여러모로 <V>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줄거리다.

비슷한 설정을 가진 선배 격 게임인 <하프라이프> 시리즈도 재미있다. 이 작품에서는 외계인들이 평화의 사절을 자칭하지는 않지만 압도적인 무력으로 7시간 만에 인류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리고 엄혹한 식민 지배가 시작되는데, 아무래도 비슷한 역사를 겪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미국과 유럽의 게이머에게 이런 이야기는 일종의 자기반성이지만, 우리 입장은 좀 다르니까.

어쨌든 계보는 이어지고 이야기는 돌고 돌아, 요즘 영상 창작자들은 유년기의 게이밍 경험을 녹여 다시 영화에 피드백하는 추세인 듯하다. 2000년대 가장 독창적인 외계인 영화 중 하나인 <디스트릭트 9>은 <하프라이프>를 비롯한 외계인 소재 게임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하다. SF 덕후인 닐 블롬캠프 감독의 취향이 워낙 노골적으로 반영된 까닭에 소품들의 모티브를 어디서 따왔는지 일일이 제목을 집어낼 수 있을 정도다. <엑스컴> 시리즈의 최신작 <엑스컴: 키메라 스쿼드>에서는 외계인 패잔병들이 지구에 낙오해 차별과 편견을 받으며 살아가는데, 이 작품 또한 <에일리언네이션>과 <디스트릭트 9>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결과리라. 시간은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는 서로를 닮게 하는 모양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