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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연기의 타이밍, ‘라방’ 김희정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3-06-27

올해 24년차 배우 김희정은 스타일리시하고 강한 모습 안쪽에 자리 잡은 멜로드라마적 재능을 발휘해보길 기다리는 여전한 초심의 배우다. <라방>에서 가진 것이라곤 의욕뿐인 취준생 동주(박선호)에게 연인 수진(김희정)은 유일한 낭만이자 이상을 허락하는 존재이고, 수진은 곧 불법 성착취 라이브 방송의 피해자가 되어 여러 폭력적인 시선 속에 ‘대상’으로 놓인다. 민감한 주제와 극 중 딜레마라는 난제를 받아든 배우 김희정은 수진이 사랑하고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다. 그리고 인물이 작품의 무게중심을 제쪽으로 당겨올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린 뒤, <라방> 속 승패 구도를 뒤집는 코너킥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순간을 담담히 소화해낸다.

- <라방> 시나리오는 어떻게 봤나.

= 빠르고 쫀쫀한 전개 덕분에 이야기 자체에 몰입해 재밌게 읽었다. 독자일 때는 나 또한 동주의 시선을 따라갔다. 수진만 놓고 보면 고민되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만큼 라이브 방송을 묘사하는 방식 등에서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만 한다는 감독님의 생각을 듣고 의지해도 되겠다는 마음이 섰다.

- 수진은 후반부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있는 인물이지만 그전까지는 주로 동주의 시선 속에서 묘사된다. 연기할 때 이를 얼마나 고려했나.

= 감독님도 처음에 우스갯소리로 “수진은 무조건 예쁜 사람이 연기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웃음) 달리 말하면 그만큼 동주가 수진에게 어마어마하게 푹 빠져 있는 상태라는 말도 된다. 동주가 자신의 연인에게 깊이 사로잡혀 있는 상태가 영화의 출발 단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설정이었고 그것이 동주의 상황을 더욱더 절박하게 만든다.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되, 후반부에서는 수진이란 사람의 숨은 의도나 매력을 관객이 되짚어볼 수 있도록 계속 레이어를 쌓아가려 했다. 수진의 진위를 어디까지 보여주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기에 실제 촬영 때 여러 버전으로 연기해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젠틀맨(박성웅) 집의 화장실에서 동주의 전화를 받을 때, 영화에선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지만 또 다른 테이크에선 수진이 동주에게 무언가 얘기하려고 망설이다가 하지 않는 모습도 있었다.

- 수진이 젠틀맨을 찾기 전, 동주와 수진은 크게 다투고 결별 직전까지 간 상황이었다. 이유는 동주가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경각심 없이 디지털 성착취 영상을 보았기 때문인데, 이런 설정이 왜 필요했다고 보았나.

= 수진은 친구들과 함께 몰카 영상을 본 남자 친구에게 크게 실망해 나무라지만, 동주는 그것에 사과하면서도 답답해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 동주 입장에선 자발적으로 봤다기보다, 살다보니 어쩌다 주어진 기회에 동참한 정도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라방>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꼭 자신이 대단히 의도하거나 선택한 것이 아니더라도 폭력이나 착취의 공모자가 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 아닐까.

- 라이브 방송과 함께 중계되는 실시간 댓글의 폭력적인 내용들이 여과 없이 보여진다. 배우로서는 어땠나, 극 중 상황의 몰입을 돕는 요소로 느꼈나.

= 정말 충격적이었다. 감독님이 취재를 통해 실제 댓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는데, 이런 댓글이 현실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직접적인 묘사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장면들이 자극적으로 다가왔는데 가만히 되짚어보니 댓글 내용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수진을 대신해 나 자신이 수치심을 느꼈다. 배우도 여러 댓글에 노출되는 직업이지 않나. 어느 정도 그런 것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라방>을 촬영하고 나서는 배우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댓글들에 노출된 여성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 주말 연속극 <꼭지>(2000)로 데뷔했고 이후 아역배우의 꼬리표를 성공적으로 덜어냈지만, 본인이 가진 오랜 내공과 본연의 결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충분히 만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의 갈증과 앞으로의 기대가 두루 궁금하다.

= 지난 몇년간 쿨하고 강한 이미지를 주로 소화했는데 앞으로는 내가 가진 단단한 부분만큼 약하고 부드러운 부분도 꺼내어 보여주고 싶다. 30대로 접어들면서 자주 하는 생각 중 하나는 인생에서 사랑이란 키워드가 너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깊이 표현하는 연기가 더욱더 하고 싶다. 그리고 친구들은 내가 약간 섹시한 이미지로 비쳐지려 하면 매번 놀리기 바쁘다. “너는 절대 섹시 뭐 그런 거 아니다!” 하면서. (웃음) 귀엽고 재밌는 작품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술꾼도시여자들> 같은?

- 힙합 댄스 크루로 활동하면서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경연 무대에 올랐고, SBS <골 때리는 그녀들> 시즌2에서 FC 원더우먼의 에이스로 활약하는 등 몸 쓰는 일에 다재다능하다.

= 몸으로 배워놓는 일은 내게 에너지를 준다. 일찍부터 배우 생활을 하면서 체득한 게 있는데, 작품과 타이밍이 맞을 때까지 스스로 힘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 춤에 몰두하다가 <골 때리는 그녀들> 덕분에 축구가 습관이 되었고 요즘엔 테니스에 빠졌다. 운동을 좋아하고 조금 강해 보이는 이미지가 배우 생활에 도움이 안될까봐 고민하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이런 건강한 모습을 좋아해주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아 다행스럽다.

- 촬영이 없어도 주 3회씩 축구 연습을 한다고.

= 발 모양이 변형될 정도로 열심히 한다. (웃음) 팀 운동은 처음인데, 그게 내게 주는 자극이 있었다. 초창기엔 민폐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고 지금도 승부에 있어서는 비슷한 심정이다. 요즘 목표가 생겼다. 연기하는 시간 밖에서 나를 채워주는 활동들에서만큼은 좀더 관대해지자는 것이다. 아직은 잘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데, 나중에는 그라운드에서 순전히 즐겁게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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