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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평범함을 파고들다, ‘라방’ 박선호
이자연 사진 오계옥 2023-06-27

동주와 여자 친구 수진(김희정)의 싸움이 시작된 건 동주의 친구가 그에게 불법촬영 라이브 주소를 보내면서부터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해보지만 수진은 이미 마음이 돌아선 듯 냉담하기만 하다. 불법촬영 라이브 방송은 어느새 수진을 위협하며 동주의 숨통을 조여온다.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 <루갈>, 영화 <챔피언> 등으로 대중 앞에 나선 배우 박선호는 동주를 통해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며 우리가 놓친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긴장감 높은 추격전을 생생히 그리기 위해 박선호는 동주의 모든 감정을 나노 단위로 분석했다.

- 동주는 수진이 불법촬영 라이브 방송의 피해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감정 변화가 가장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지점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표현하려 했나.

= 처음 시나리오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겁이 많이 났다. 동주가 느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어려워 보였다. 작품 특성상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기보다 개별적으로 촬영을 해야 해서 망설임이 더 컸다. 하지만 배우로서 이런 스릴러 추격물을 꼭 해보고 싶었다. 고민 끝에 동주를 분석해갔더니 최주연 감독님께서 그러시더라. “선호씨가 동주예요.” 그 뒤로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동주가 현실적으로 보였다. 동주는 이미 영화 초반부터 감정과 텐션이 높은 상태다.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더 강한 분노를 보여주기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변주할 수 있을까 고민이 컸다. 그래서 오히려 탈진한 상태로 연기했다. 분노로 인해 땅을 치고 책상을 내리치다가도, 더이상 발악할 에너지가 없어 힘이 쫙 빠진 듯한 모습이 다른 결의 분노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 손을 많이 사용했다. 젠틀맨(박성웅)의 악행을 보는 표정은 극적인 분노를 드러내지만 한편으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손끝을 떨었다.

- 동주의 모든 감정을 세세하게 연구한 덕일까. 비언어적인 요소를 섬세하게 파악했다.

= 어릴 적에 눈앞이 캄캄해진 적이 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블랙아웃됐는데, 동주의 상황도 그럴 것 같았다. 내가 경험했던 감정을 반영하면서 연기하니 한결 편안했다.

- 모니터 앞에 앉아 혼자 사건을 처리하는 동주처럼 박선호 배우도 홀로 카메라 앞에 앉아 연기를 펼쳐야만 했다. 상대 배우가 없는 연기는 어땠나.

= 철저히 상상에 의존했다. 다행히도 촬영 현장에 가기 전에 미리 연습하고 준비해둬서 동주를 다양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1번 방식으로 연기하다가 2번 느낌으로 가보고 둘을 섞어보기도 하고. 이때 젠틀맨이 동주를 자극하기 위해 하는 말들을 가장 많이 떠올렸다. 또 몸 안의 근육을 활용하고자 했다. 온몸에 힘을 주고 숨을 참으면 쇄골부터 이마까지 빨개져서 흥분한 상태의 피부를 표현할 수 있다. 한 장소에서 상대 배우 없이 계속 이어지는 촬영이었기 때문에 동주의 세세한 감정 변화로 프레임을 가득 메워야 했다. 막연한 감정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해낸 과정이 개인적으로 무척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 내내 방 안에서만 이야기를 끌고 가던 동주가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컴퓨터를 들고 길 위를 달리고 구른다. 실제 촬영 과정은 어땠나.

= 일단 세트장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았다. 야외에서 촬영한다니! (웃음) 동주의 방은 내내 감정을 쏟아내기만 하던 공간이라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차분해지고 엄숙해진다. 그런데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동주가 밖으로 나섰을 땐 다른 사람도 있고 바람도 쐴 수 있어서 힘이 났다. 길거리를 배회하며 젠틀맨을 신고할지 말지 고민하던 장면만 이틀을 촬영했다. 내가 그렇게 달리기가 빠른 편은 아닌데 촬영감독님이 속도감 있게 찍어주셨다.

- 동주는 사건에 얽힌 이후 또래 친구들에게 사이버 성범죄의 문제의식을 강조하지만, 과거엔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며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동주에게 어떤 현실성이 반영됐다고 생각하나.

= 동주는 평범하디 평범하다. 주위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이랄까. 실제로 자신의 일이 되기까지 동주는 불법 동영상이나 불법 사이트를 공유하는 친구들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바라봤다. 만약 그게 정말 싫었다면 더 강경하게 말하거나 친구들을 멀리할 수도 있었지만 동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동주는 범죄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자신이 직접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라고 합리화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현실에서도 이런 인식이 미비하다 보니 동주의 태도 변화가 영화의 주요 메시지를 잘 담아낸다고 느꼈다.

- 젠틀맨과 동주의 이파전으로 보이던 갈등은 동주 친구들의 등장으로 복잡한 이면을 마주한다. 이 과정에서 김균하 배우, 조정원 배우와 함께 많은 것을 의논하고 나눈 것 같다.

= 촬영을 함께하며 정말 크게 믿고 의지했다. 호흡을 주고받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더 끈끈해졌다. 연기를 잘하기 위한 직접적인 자극도 받았다. 다 같이 둘러앉아 시나리오 공부를 많이 했다. 감독님께 적극적으로 의견을 보태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동주야” 하고 부르는 장면에서는 여느 친구들이 그러하듯 “야 똥주!”라는 식으로 바꾸었다. 실제 또래가 쓰는 말투와 어휘를 사용해서 현실성을 높이고자 했다.

- <라방>을 통해 스스로 어떤 통찰과 의미를 얻었다고 생각하나.

= 기존에 주로 참여했던 로맨스물이나 코미디와는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졌다. 사이버 성범죄가 무거운 주제이지 않나.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더 진중하게 소화하고 의미가 왜곡되지 않게 전달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스스로도 사이버 성범죄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더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건강한 사회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관객도 <라방>을 통해 자신이 모르고 놓쳐버린 것들을 다시금 곱씹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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