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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던 그날들,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이혁래 감독
이우빈 2023-11-09

영화는 그리움의 매체다. 영화 속의 순간은 늘 지나간 시간이므로 영화를 좋아한다는 일은 필연적으로 과거를 좋아하는 일과 진배없다. 이는 작금의 시네필들이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이하 <노란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란문>은 한국 영화문화의 폭발적인 부흥기였던 1990년대의 공기를 담았는데, 작품의 중심엔 영화 동아리 ‘노란문’이 있다. 서울권 대학원생, 대학생으로 구성된 노란문은 영화를 좋아한다는 일념 아래 모인 이들이 자유롭게 노는 곳이었다. 함께 영화를 보고, 영화를 분석하며 이야기하고, 영화 학술지를 만들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 노란문엔 장차 한국영화계를 이끌어갈 젊은 시절의 봉준호 감독이 있었다. 당시 노란문의 연출 분과에서 활동했던 이혁래 감독은 30년이 흐른 후 노란문의 기억을 끄집어내 다큐멘터리 <노란문>을 완성했다.

- 노란문에 언제 들어가서 언제 나왔나.

= 1992년이었다. 노란문이 1991년에 시작되긴 했지만, 노란문이란 이름을 붙이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건 1992년이었다. 그러니 노란문이 영화 단체의 꼴을 갖추기 시작할 때쯤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1993년엔 초기에 학술지를 만들 때까진 활발히 활동했지만 그 후엔 많이 나가진 못했다. 다른 영화 단체인 ‘영화제작소 현실’에서 16mm 단편영화 <지하생활자>를 만들면서 조명부 스탭으로 일하느라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 당시 영화 단체간의 인력 교류나 공동 제작이 자주 있었나.

= 있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도 나오듯 그때 당시의 노란문은 다른 단체에 비해 영화를 제작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었다. 영화제작소 현실과 대등하게 공동 제작을 했다기보단 내가 개인적으로 참여하러 간 경우에 가깝다. 노란문 멤버들이 다 같이 <룩킹 포 파라다이스>를 본 이후부터 우리 사이엔 은근한 열망과 조바심이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제작 여건이 더 전문적인 곳에서 뭔가를 만들어보려 했던 것 같다.

- 노란문의 연출, 시나리오, 비평 분과 중 어디에 속했었나.

= 연출 분과였다. 비율로도 연출 분과 멤버가 가장 많았다. 비평이야 영화 보고 평론을 쓰면 되고, 시나리오도 아이디어가 있다면 실질적인 활동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내가 내 영화를 연출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DVD 서플먼트 같은 자료도 없던 때여서 우리끼리 뜬구름 잡는 식으로 장면 분석을 하곤 했었다. 다만 영화가 좋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마음만은 구성원 모두가 같았다. 노란문을 포함한 여러 영화 단체의 이런 움직임들이 모여서 90년대 중반부터 예술영화 전용관 건립, 부산국제영화제의 탄생 등 시네필 문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됐다.

- 즐거웠던 호시절을 떠올리는 다큐멘터리지만, 이젠 돌아갈 수 없는 노스탤지어로 향하는 애수도 느껴진다. 작품에 어떤 감정을 담고 싶었나.

= 사실 90년대가 상식적인 의미에서 호시절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애초 기획부터 관객들에게 슬픔보단 웃음을 끌어내는 게 목표였다. 지금보다 영화 보기도 훨씬 힘들었고, 보더라도 조악한 화질과 자막이 넘쳐났다. 어쩌면 그런 장애물들 때문에 당시의 활동이 더 재미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정말 별것 없는 활동들이었고 단지 영화를 공부하는 일이었는데도 그랬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우리도 이전 세대의 영화들과 영화 문화를 더 선망했던 것 같다.

- 각자의 황금시대란 늘 과거에 있지 않나.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부산 시네필상을 받은 일도 의미심장하다. 지금의 영화과 학생들이 투표하는 부문이기 때문이다.

= 90년대 초와 지금의 영화산업이 다소 비슷한 상황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90년대는 한국영화라는 게 아예 사멸해가던 상황이었다. 1988년에 미국 영화 직배(국내 배급사를 거치지 않고 외국영화 제작사들이 영화를 배급하는 방식.-편집자)가 시작되고, 다들 “왜 한국영화를 봐?”라고 말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지금 한국영화의 위상은 아예 딴판이 됐지만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지금은 아예 영화라는 매체의 약세가 드러나고 있다. 90년대엔 한국영화가 계속 존재할 것인지에 대한 불안이 팽배했다면, 지금은 영화가 죽지 않을 것인지의 불안으로 커진 셈이다. 그래서 지금의 젊은 관객들이 정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지도 모른다.

- 특정 인물 중심이 아니라 노란문 멤버 전원의 이야기로 작품을 구성한 것도 대다수 관객의 공감대를 얻는 데에 일조했다. 봉준호 감독의 존재감을 줄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겠다.

= 어려웠다. 봉준호 감독처럼 익숙한 인물이 옛이야기를 해주면 재밌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 과거를 말하니까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더라. 그래서 각 인물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기로 했다. 봉준호 감독이 있던 영화 동아리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단체고 훌륭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거꾸로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나니 각자의 매력이 생기더라. 예를 들어 첫 장면에 나오는 임훈아씨는 <룩킹 포 파라다이스>의 전체적인 구성을 새겨두곤 있지만 정작 주인공과 악당을 완전히 거꾸로 기억하고 있다. 또 노란문 멤버들이 찍은 사진은 조금씩 초점이 나가 있다. 이런 묘한 허술함이 다큐멘터리에 몰입감을 부여했다.

- 본인에게 노란문은 어떤 의미인가.

= 노란문 때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은 마틴 스코세이지가 편집한 <우드스탁: 사랑과 평화의 3일>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자유의 분위기와 히피들의 모습을 노란문의 형, 누나들에게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운동권 시대, 미국의 히피 시대와 멀었던 내게 일종의 동경심을 안겨준 거다. 그곳에서만큼은 모든 짐을 벗어놓고 맘껏 놀 수 있었다. 특별한 규칙이나 제약 없이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게 노란문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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