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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오! 컬트 <택시 드라이버>
2002-06-12

죽거나 살거나 나는 `씹새끼`

이를테면 이런 경우가 있다.

여자와 공원에서 데이트를 하던 한 남자가 옆이 소란스러워서 힐끗 쳐다보았는데 소란스러운 쪽은 이른바 깡패, 혹은 양아치, 혹은 이유없이 원래 나쁜 놈이다.

깡패: 뭘 봐 새꺄!

남자는 잠시 혼란에 빠진다. 뭘 봤는지 대답을 해야 할 것인지, 왜 반말에 욕지거리냐고 따져야 할지, 그리고 그것을 존대말로 대답해야 할지 아니면 받은 대로 반말과 욕설을 섞어서 대답을 해줘야 할지 몹시 혼란스럽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유의 혼란은 아무렇게나 뭉쳐던진 실타래가 머리 속에 뇌 대신 자리한 것과 같은 막막함을 갖게 한다. 1. 왜 반말이세요? 2. 너 봤다 새꺄! 3. 죄송합니다. 4. …(그냥 무시한다)

위의 셋 중에 하나 골라서 대답했다고 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자.

여자는 공포에 질려 울고 서 있고 남자는 안경이 깨진 채 코피를 흘리며 자빠져 있다. 남자가 작살이 난 까닭은 위의 대답 중에 정답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 아니다. 정답은 없다. 그냥 깡패가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아무나 걸리면 작살을 내주기로 결심한 날, 하필 그를 쳐다봤기 때문에 상대역으로 캐스팅이 돼버린 것이다. 깡패는 ‘오늘 누구든 걸리면 죽여버린다’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고, 안경이 깨진 남자는 오늘 그녀에게 근사하게 프로포즈를 할 로맨틱한 설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반된 스토리가 만날 때는 언제나 나쁜 스토리가 계획대로 완성될 확률이 훨씬 높다.

악이란 그런 것이다. 폭력이란 그렇게 편리한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오늘 밤 아무 집이든 하나 골라서 불을 지르겠다고 결심하면, 서울 시내의 모든 집들 중에서 하나를 불태울 수 있다. 불을 지르겠다는 계획은 절박한 것도 아니요, 필연적인 목적도 없고 간절한 소망도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절박한 소망- 우리집이 불타기를 원하지 않는- 당연한 바람을 쉽게 능가해버린다. 쉽게 부숴버릴 수 있다.

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결심만 필요하다. 그러나 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과 장치들과 금욕이 필요하다.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불철주야 방어벽을 세우고 무인보안장치도 해야 하고 더 정교한 자물쇠 장치들을 구입해야 한다. 폭력을 행사하고 싶으면 밤길에 나다니며 기습을 자행하면 된다. 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둡고 한적한 길을 피해야 한다. 그렇다. 악은 돌아다니면 되고 선은 피해다녀야 한다. 악은 한결 편리하다.

남자를 유효타 두어대만으로 작살을 낸 깡패가 나자빠진 채 난감해진 남자에게 카리스마 넘치게 지껄인다.

깡패: 이 씹새끼야 죽을래?

역시 이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작성하기란 쉽지가 않다. 우선 가장 급한 대답은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 대답을 해줘야 할 것인데, 그 대답을 하자니 그럼 내가 ‘씹새끼’라는 것에 자동으로 동의를 하게 되는 꼴이 되므로 살든지 죽든지 어쨌든 나는 씹새끼가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나는 씹새끼로 살든지 아니면 씹새끼로 죽든지 선택을 하라는 것인데, 그러자니 일단 “나를 씹새끼라고 부르지 마세요”"라고 먼저 요구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은 “죽을래?”라는 심각한 질문에 대해 뚱딴지 같은 대답이 돼버리고 만다.

1. 무조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2. 깡패를 작살낸다.

이 모든 것은 부당하게 시작되었으므로 부당하게 끝난다.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든지 더 강력한 폭력으로 복수를 하든지. 부당한 폭력에 대해서 정당한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악의 힘이다. 폭력의 힘이다. 깡패를 작살내도 결과는 폭력의 승리다.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는 베트남전에서 살아 돌아와보니 세상이 온통 개판이었다. 사회악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아 그냥 쓸어버려야 한다는 강박관념밖에 생기지 않는, 하지만 결과는 정의의 사도의 승리인가 새로운 살인마의 탄생인가. 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리더 http://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