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가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1승을 거머쥐던 날, ‘세상은 변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높아 보이고 한국 축구로서는 절대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세계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평소 축구는 물론이거니와 스포츠 전반에 걸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내가 그 순간을 그 정도로 감격스러워했다면, 몇년째 한국 축구팀을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붉은 악마를 포함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보여준 그날 밤의 광란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구호를 경적으로 울리며 창문과 트렁크에 사람들을 가득 싣고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의 행렬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 순간만큼은, 어딘가 아주 낯선 나라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전 국민으로부터 동시에 뿜어져나온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한반도 전체를 잠시나마 다른 차원의 세계로 옮겨다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다분히 황당한 상상을 할 정도였던 것.
흥미로운 것은 한국 축구가 그런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기 얼마 전, 한국영화도 이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임권택 감독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이 바로 그것. 평소 세계적인 거장들만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칸의 감독상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임권택 감독이 거머쥔 모습은 그야말로 감격적이었다. 우리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 그랬듯이, 외국의 영화마니아들이 임권택의 이름을 외우고 그의 작품을 찾아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찡해지기까지 한다. 따라서 그런 역사적인(?) 결정을 내린 칸영화제 심사위원단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중에서도 심사위원장을 맡은 데이비드 린치의 경우 그의 최근작인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여진이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여서 더더욱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던 차에 데이비드 린치가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를 개설해, 아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항상 낯설고 당황스런 영화를 주로 만들어왔던 데이비드 린치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도 일단 뉴스거리였지만, 영화를 통해서는 보여주지 못했던 그의 또 다른 재능들이 독특한 스타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수많은 팬들이 일거에 몰려들었던 것. 그 스스로도 한 인터뷰를 통해 ‘나는 이제 24시간 언제나 살아 있다. 이것이 바로 미래’라며 흥분했을 정도로, 이번에 개설된 홈페이지는 데이비드 린치의 전혀 새로운 실험이라고 불릴 만하다. 일단 전체 홈페이지를 흑백톤으로 가고 거기에 빨간색 점들을 통해 포인트를 주는 디자인부터 린치 스스로의 아이디어인데다가, 그 속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콘텐츠를 직접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시도는 바로 데이비드 린치가 직접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 ‘바보 같은 땅’ 뭐 이런 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이 단편 애니메이션은 팀 버튼의 <스테인보이>와 같이 스톡옵션을 받는 방식으로 쇼크웨이브사와의 계약을 통해 진행되던 프로젝트였는데, 경영난으로 쇼크웨이브사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자 공식 홈페이지용으로 작업을 전환한 것이다. 하얀 종이 위에 검정색으로 그려진 투박한 만화 형태인 이 는 영화에서는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데이비드 린치의 엽기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물론 그림의 완성도만 따진다면 국내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인터넷용 애니메이션에 비교할 수도 없지만, 데이비드 린치가 그려낸 썰렁하면서도 황당한 이야기는 분명 매력적이다. 9개로 예정된 전체 에피소드들 중에서 현재까지 소개된 것은 모두 5개이며, 모든 에피소드가 다 소개되면 이라는 초현실주의적인 내용의 새로운 실사 시리즈가 공개될 예정이다.
이런 단편 시리즈 이외에도 독특한 코너들은 많이 있다. 우선 데이비드 린치의 딸인 제니퍼 린치가 직접 진행하는 (Odd+Radio)라는 인터넷 라디오쇼가 매주 공개되고 있고, 데이비드 린치가 찍은 3분에서 10분 정도 길이의 실험적이고 몽환적인 영상물이 담겨져 있는 ‘Experiments’도 눈길을 끈다. 또한 임권택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지난 칸영화제 기간 동안 데이비드 린치가 직접 찍은 일종의 비디오 에세이를 모아놓은 칸 다이어리 코너도 아주 흥미롭다. 더불어 새모이가 나오는 통 앞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다양한 새들이 날아와 먹이를 먹거나 다람쥐들이 와서 새 모이를 가지고 달아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Live’ 코너와 데이비드 린치가 직접 작업한 각종 사진작품과 회화작품을 볼 수 있는 ‘Gallery’ 코너도 준비되어 있다. 이렇게 인터넷을 통한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도, 정작 데이비드 린치 스스로는 이것이 단지 아주 미약한 시작일 뿐이라고 누차 강조해왔다. 그만큼 이 홈페이지에 큰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홈페이지에 담긴 대부분의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한달에 10달러 정도를 내야 하는 유료 회원으로 가입해야 한다. 광고를 붙이거나 스폰서를 구하지 않고 오로지 약 25만명으로 추산되는 자신의 열성적인 팬들을 위한 콘텐츠로만 가득 채웠다는 것이 그런 유료화 정책의 이유. 처음에는 이런 유료화 시도에 대해 우려의 시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데이비드 린치 스스로가 유료화의 정당성을 홈페이지 이곳저곳에 강조해놓고 있는데다가 지난 3월 공식 오픈한 이후로 수많은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별탈없이 꾸준히 유료 이용자가 늘고 있는 중이다. 만약 데이비드 린치 공식 홈페이지의 이런 독특한 시도(홈페이지만을 위한 콘텐츠의 생산 및 유료화)가 어느 정도 성공적인 일로 판명날 경우, 향후 다른 작가 감독들의 홈페이지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사진설명
1. 데이비드 린치 공식 홈페이지.
2.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 소개된 데이비드 린치의 공식 홈페이지.
3-4. 데이비드 린치가 직접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 .
5. 단편 실사 시리즈로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될 예정인 .
6. 데이비드 린치의 딸 제니퍼 린치가 진행하는 인터넷 라디오 쇼 .
데이비드 린치 공식 홈페이지 : http://www.davidlyn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