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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감염과 면역의 몽타주 작가로서의 하마구치 류스케를 말하다

성행위 도중 트랜스 상태에 빠진 오토의 입 밖으로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가 새어 나온다. 가후쿠는 아내인 오토와 몸을 맞대며 최면에 걸린 듯한 그녀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그러나 그녀가 일상으로 돌아오면 전혀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를 듣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첫 장면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다루는 신체의 성질을 예시한다. 피부가 맞닿는 지점에서 몸은 내 것이 아닌 외부의 자극에 일시적으로 노출된다. 무의식 상태에서 출처 모를 이야기를 구술하는 오토,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 다음 날이면 여덟 살 아이의 인격을 드러내곤 했다는 미사키 엄마의 몸이 증언하듯 하마구치는 한 사람의 신체에 타인의 흔적이 겹쳐지는 이중화된 형상을 주시한다. <천국은 아직 멀어>에선 주인공 유조의 몸에 죽은 여고생 유령이 빙의되고, <우연과 상상>의 3부에서 나츠코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처음 만난 인물을 고등학교 동창으로 오해한다. 하마구치의 영화에서 (<아사코>의 두 주인공이 찾아가는 사진전 제목인) ‘자아와 타자(Self and Others)’가 만나는 장소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나’의 고유성이 진동하고 희박해지는 몸(들)의 경계면이다.

비유컨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외부에서 침입하는 감염과 그 감염에 대항해 항체를 만들고 신체를 재구성하는 면역이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우연과 상상>이 설정하는 근미래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그렇듯, 감염된 세계는 내부에 머무는 신체를 미세하게 변형한다. ‘나’의 자아를 이루는 신체는 작은 오류에도 치명적으로 흔들릴 만큼 연약하고 위태로운 것이다. 몸속에 무언가 침입한다. 카메라와 마이크는 신체 내부에 들어온 자극으로 인해 생겨난 변형을 기록한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스크린에 비친 신체는 완벽히 내 것이라고 확증할 수 없는 불안정한 정체성의 표면으로 재구성된다. 휴가지에서 처음 만난 상황을 가정해 서로 첫인사를 주고받는 <해피 아워>의 네 친구는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불안정한 표면에 적합한 몸짓을 실천하던 것이다.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

침입에 대응하는 면역의 방법론으로 하마구치가 활용하는 것은 인물들의 말, 그중에서도 거절과 부정의 언어다. 한창 대화가 흘러가다 불쑥 상대방의 의견을 자르고 거절과 부정의 말을 내뱉는 순간은 하마구치의 화면에 특별한 긴장을 부여한다. 주인공의 남편과 작가가 대화를 나누는 <해피 아워>의 낭독회 현장에서, 친구의 연기를 두고 누군가 혹평을 늘어놓는 <아사코>의 한 장면에서, 자신을 고등학교 친구라고 믿는 타인을 집에 데려온 <우연과 상상>의 한 장면에서, 글램핑장을 만들려는 회사 직원들과 마을 주민들이 모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공청회장에서 하마구치의 인물들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연다. 나는 네 생각과 달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야. 거절과 부정은 ‘나’와 ‘타인’을 나누는 분기점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숏의 긴 지속을 끊어내고 불가피하게 다음 숏으로 전환하게 한다. 거절과 부정의 말은 숏에 새겨진 굳건한 자기확신에 의심을 부여하고, 커팅 없이 이어지던 영화적 이미지의 표면에 불투명한 리버스숏을 덧붙인다.

하마구치는 <해피 아워>와 <아사코>에서 자동차에 탑승한 카메라가 인물에게서 천천히 멀어지는 장면을 반복해서 연출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는 자동차를 타고 딸과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한다. 그의 인물들은 어딘가로 떠나거나 헤어지는 순간에 얼굴을 맞대고 작별을 고하는 대신 자동차라는 이동수단을 매개로 상대방과의 거리를 늘어뜨린다. 반대로 예기치 않게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도 있다. <아사코>에서 처음 만난 아사코와 바쿠의 갑작스러운 키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언제나 거리를 두고 대화하던 가후쿠와 미사키가 마침내 서로의 트라우마를 끌어안으며 나누는 포옹은 두 사람이 유지하던 물리적 거리를 순간적으로 좁혀버린다.

이처럼 하마구치는 인물들 사이에서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거리감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측한다. 이런 장면들에서 자동차/카메라는 떨어진 신체 사이의 거리감을 조정하는 기계적 장치로 나타난다. 자동차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이동수단은 거듭해서 달라지는 거리감을 스크린에 기록한다.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서로 다른 움직임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하마구치의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나오는 대사처럼 “지금 무언가 벌어졌다”는 것을 지각한다. 집과 일터와 공공장소를 오고 가는 자동차의 움직임만으로 대부분 채워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도쿄와 시골 마을을 오가던 글램핑 회사 직원 타카하시는 나무를 토막 내고 물을 긷는 타쿠미의 삶에 갑작스럽게 동화된다. 이렇다 할 근거는 없다. 두 인물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단계에서 무언가 벌어진 것이다. 고다르의 견해를 빌려 “모든 극영화는 배우의 신체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주장하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가 인물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런 순간에 가닿기 위함이다. 그의 영화에서 빙의, 트랜스, 연기의 절차는 인물의 정체성이 뒤바뀌는 순간을 지시한다. 인물의 신체가 다큐멘터리라면, 신체에서 벌어지는 비가시적인 변형은 극영화라는 픽션을 매개로 관측된다.

(아래 문단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결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화 안의 타인

무언가 벌어졌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타쿠미가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인 상황으로 시작해, 가장 픽션적인 사건으로 끝난다. 타쿠미는 왜 실종된 딸을 같이 찾던 글램핑 회사 직원을 살해한 건지, 왜 하나와 사슴이 같은 형체로 보이는 착시가 나타나는지 명확한 실체와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식적으로 해석한다면 타쿠미는 자연의 질서를 대리해 인위적으로 숲에 개입한 외부인을 처단하고 하나를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흥미롭지 않다. 게다가 자연의 질서에 인위적으로 개입한 것은, 앙각 촬영과 수평이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물은 언제나 상류에서 하류로 흐른다”는 자연 풍경의 원칙을 거스르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카메라/시선 자체이기도 하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하마구치의 영화에서 침입은 두려움과 떨림을 동반하며 영화의 신체를 흔드는 관능적 활동이지 퇴치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무의식 상태의 오토가 가후쿠에게 들려주던 것은 좋아하는 동급생의 집에 몰래 침입하는 여고생 이야기였다. 하마구치의 작업은 언제나 영화 안에 낯선 타인을 끌어들여 장면을 지탱하던 견고한 질서를 흐트러트린다. 히나가 사라지자 모든 마을 주민이 수색에 나서는 것처럼, 바깥에서의 침입으로 발생한 사건은 영화의 몸짓을 가장 활발하게 일으키는 단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첫 장면은 불안하다. 수직으로 뻗은 나무들로 채워진 숲속 풍경을 정교한 앙각 촬영으로 비추는 긴 이동숏은 보이지 않는 시선의 주인을 빈칸에 남겨둔다. 몇 분 동안 이어지는 첫 장면이 끝나면 눈 덮인 숲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하나의 장면으로 전환된다. 두 번째 숏의 개입은 첫 숏이 안겨주는 불안을 강화한다. 두 장면이 연결된 것인지, 서로 무관한 것인지 영화의 카메라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숲을 올려다보는 첫 숏의 시선은 인간의 시선이라기엔 너무 반듯하고 정교하다. 그런데 두 번째 숏은 그것이 마치 하나의 시선인 것처럼 가장한다.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시선과 대상이 정확히 접속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카메라에 비친 풍경을 지켜볼 뿐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영화의 카메라가 어떤 시선도 대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직 처음 두 장면이 지나갔을 뿐이지만, 우리는 일찌감치 이 영화가 구축한 모호한 시선의 구조에 붙잡혀 있다.

하마구치는 낯선 설원에 도착해 드라마의 문맥으로 설명되지 않는 불투명한 결말을 세공한다. 하지만 이 설원은 한편으로는 오시마 나기사와 아다치 마사오가 제기하던 일본영화의 ‘풍경론’을 비틀어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마구치가 천착하던 감염과 면역, 다시 말해 영화적 이중화를 구축하는 무대라는 점에서 낯설지 않다. 결말에서 벌어진 것은 무엇인가? 느닷없는 히나의 실종과 타카하시의 목을 졸라 죽이는 타쿠미의 살인이다. 즉 신체를 가장 멀리 떨어뜨리는 사건(‘실종’)과 가장 가까이 밀착시키는 사건(‘살인’)이 거리감을 조정하는 영화의 역학 아래 접속한다. 그 접속은 픽션적 무대 안에서 두 가지 이중화의 형상을 불러온다. 첫 번째는 한 가지 정체성(‘목수’)이 두 남자(타쿠미와 타카하시)로 나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서로 다른 존재(하나와 사슴)가 하나의 형상으로 겹치는 것이다. 그 형상들이 중첩된 자리에서 살인과 재회라는 결과가 산출된다. 이는 이야기를 이끌고 온 서사의 역량도 아니고, 이미지 자체의 역량도 아니며, 자연 속에서 동물과 인간이 결합한 상징적 의미의 역량도 아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장면에서 그가 영화 내부에서 구축한 감염과 면역의 이중적 형상을 나란히 배치한 뒤, 그 사이를 관통하는 몽타주의 역량을 폭발시킨다. 둘 이상의 이미지가 충돌한다면 드라마의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건은 발생해야 한다. 영화와 신체와 픽션의 관계를 가로지르는 하마구치의 영화적 실천이 이 결말에 응축되어 있다. 스크린에 떠오른 불투명한 시각적 사건 말고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결말은 가장 절대적인 영화적 믿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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