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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책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쓴 뮤지션, 배우, 화가, DJ 김창완, ‘수많은 아침 곁에서’
정재현 사진 오계옥 2024-04-04

언젠가 좋아한다고 밝힌 알랭 코르노의 영화 제목처럼, 김창완은 23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맞는 ‘세상의 모든 아침’을 지키는 남자였다. 그는 매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2000년 10월2일에 시작해 2024년 3월17일까지 SBS 파워FM의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이하 <아침창>)의 <아침창> 아저씨였다. 김창완은 <아침창>을 진행하는 동안 늘 오프닝 멘트를 직접 썼고 가끔 고민 사연에 편지를 써 답했다. 김창완의 신간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는 <아침창> 마지막 방송이 끝나고 2주가 지난 뒤 세상에 나왔다. <아침창>의 오프닝 멘트와 여러 곳에 연재한 수필 그리고 고민 해결 편지를 묶은 책이다. <씨네21>은 잠시 혼자만의 아침을 만끽 중인 김창완과 만나 긴 대화를 나누었다. 공교롭게도 김창완에게 만남을 청한 시각도 그가 몇주 전이었다면 라디오 부스에 있었을 아침이었다.

- 2016년 한차례 <아침창>의 오프닝 멘트를 모은 책 <안녕, 나의 모든 하루>를 출간한 바 있다. 8년이 지난 지금 또 한번 동일한 컨셉의 책을 출판한 이유가 있다면.

= 지난해 독집 《나는 지구인이다》를 발매하며 “음악이란 부르면 사라지는 것이라 좋다”는 말을 전한 적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허공에 뿌려진 오프닝 멘트와 엽서들을 다시 모은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책 제안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래도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아 출판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떻게 꾸며질지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출판사에서 ‘위로’를 키워드로 잡아 출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불편했다. 현실이 팍팍하고 절박하다지만 ‘위로가 활자로 가능한가?’ 하는 생각에 주저했다. 내 위로가 실질의 위로가 되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도 컸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은 내가 극복할 일은 아니었다. <아침창> 가족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이걸 가지고 내가 말을 얹을 바는 아니지 않나 싶더라. 책을 많이 팔면 저자로서 인세가 생길 터다. 한데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여태 방송을 들어준 <아침창> 가족들에게 내 말들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출판사(웅진지식하우스)에 전부 일임한 후 인세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홀가분했다. 위로는 결국 스스로를 받아들이며 현재를 인정할 때 발생한다. 나의 인사말을 통해 독자 각자의 처지를 이해하길 바란다.

누구도 결과는 알 수 없다

- 책의 제목과 연관된 동그라미 엽서는 SNS를 통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저마다 처한 환경도, 상처받는 부분도 다르지 않나. 개인이 겪는 불안과 우울이 너무 일반화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물론 세대 공동의 고민이 있겠고 해결책을 함께 모색하는 게 의미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고민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듯 오해하게 만들까 우려된다. 동그라미는 한 직장인의 고민으로 인해 그려본 것이다. 매일 아침 생방송을 했던 나야 그와 처지가 흡사했지만, 지금 당장 호구가 절박한 사람이나 병간호해야 하는 이에겐 이 사연이 고민으로 안느껴질 수도 있다.

- 평소에도 동그라미를 습관처럼 그린다고 들었다. 한 인터뷰에선 매년 새 글씨를 만들 때마다 동그란 글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전한 바 있던데.

= 별거 아니다. 그냥 그림 연습이다. 그림 수업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기타 연습하듯 동그라미를 그린다. 방송 대본이 쓰인 이면지를 버리기에 아까우니 한동안 동그라미를 엄청 그렸다. (허공에 손가락을 휘휘 돌리며) 내가 지금 그린 동그라미를 보라. 멈추었다 다시 동그라미를 그리면 동그라미가 잘 안 그려진다. 계속 손이 돌아가야 완전한 동그라미가 나온다.

- 여러 인터뷰에서 ‘목적 글’은 잘 쓰지 못한다고 밝힌 적 있다. 그런데 라디오 방송의 오프닝 멘트야 말로 써야 하는 목적이 분명한 글인데.

= 내가 말한 목적은 의도로 해석하는 편이 낫다. 오프닝 멘트를 쓴다 한들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긴 어렵다. 청취자를 설득하는 글이었다면 힘겹게 썼을 것이다.

- 글을 끝맺는 방식이 독특하다. 결론을 내며 끝나는 글도 있지만 새 의제를 던지며 끝나는 경우도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야말로 진짜 내 시간은 아닐까>와 같은 글이 그렇다.

= 글까지 도달하는 행로를 적은 경우가 많다. 읽어봐야 독자들에게 전달이 될 테다. 나 자신도 그리고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 자체에 사로잡히지 않고자 했다. 인터뷰를 할 때도 이게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한번도 상정하지 않았다. <아침창> 마지막 생방송에도 “나는 이별을 준비하는것 같아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멘트를 건넸다. 내가 글쓰기와 일상을 대하는 태도다. 누구도 결과는 알 수 없다. 내겐 통념이나 편견이 늘 장애물이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해왔다.

- 기타를 메고 자전거를 타는 삽화가 책에 그려져 있다. <아침창>을 진행한 23년간 자전거로 방송국에 출퇴근한 일화도 유명했는데.

= 미치지 않고서야 기타를 메고 자전거를 탔을 리가. (웃음) 언젠가 기타를 한번 잃어버린 적 있어 기타를 스튜디오에 가져다 놓은 뒤 ‘훔친 기타’라 크게 써놓았다. 훔친 기타라고 써놓으면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았다. 신청곡이 나가는 동안 기타를 많이 연주했다. 기타 연습은 정말 많이 해야 한다.

- 아직도 연습이 필요한가.

= 아직도가 무언가. 기타는 계속 연습해도 안되는 악기다.

- 책 속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이하 <월광>)을 끝없이 기타로 연습했지만, 단 한번도 흡족한 연주를 한 적 없다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런데 《나는 지구인이다》에 <월광>의 1악장을 기타로 연주해 수록했다.

= <월광>이 그렇게 연주하기 어려웠다. 내게도 안되는 무언가가 하나 있다는 게 좋았다. 마음이 즐거울 때도 연주했지만 달빛이 교교한 밤에 깼을 때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월광>을 기타로 연주했다. 순식간에 몰입이 되니 두려운 마음을 금세 떨칠 수 있었다. 내게 <월광>은 매일 오르지만 매일 달리 보이는 산길 같았다. 그러니 때만 되면 오른다. <월광>의 조성은 C#마이 너지만 기타의 음역을 고려해 A마이너로 연주했다. 오밤중에 <월광>을 연주하고 있으면 그렇게 스스로가 측은할 수가 없다. (웃음) 언젠가 공연 연습을 하다 산울림의 <둘이서>(1978)가 A마이너 코드임을 알아차렸다. <둘이서>를 《나는 지구인이다》에 넣기로 했던 터라 덩달아 <월광>을 수록했다. (기타를 가져와 <월광>과 <둘이서>를 연이어 연주한다.) 노랠 들으며 김창완이 마음이 불편할 때 한밤중 일어나 이런 걸 하고 있다는 걸 연상하면 된다.

-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월광> 중 유독 좋아하는 버전이 있는지.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이 할아버지의 인자한 웃음이 좋다. 누군가 호로비츠에게 “이걸 어떻게 외냐”고 물었을 때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답한 게 마음에 와닿았다. <월광>을 연습하면서도 나는 머리가 아닌 손가락으로 외려 했다. 그런데 손가락도 기억력이 떨어지더라.

- 글렌 굴드에 관한 상찬도 책 속에 등장한다.

= 여전히 굴드를 좋아한다. 지금도 나만의 <월광>을 찾기 위해 거듭 연습 중이다. 악보대로 <월광>을 연주하는 사람을 떠올릴 때면 글렌 굴드를 염두에 둔다. 일체의 사념을 없애고 정직하게, 해골 같은 음정으로 음악에 돌아가야 할 때 찾는다. 다시 <월광>을 연습하는 중이다. 이전 버전은 어쩐지 감정의 기복과 분출이 많아 반성하는 마음으로 굴드를 찾는다.

- 출근길에 마주한 계절의 변화가 글에 자주 등장한다. 종종 가는 계절이 ‘밉다’고 쓴 표현도 인상적이다.

= 마음 가는 대로 쓴 거지. 단풍놀이 철에 다들 가을 산을 보며 좋아하는데 친구에게 “가을 산 아무리 봐도 똥색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아침 방송을 하기 때문에 수많은 아침을 만나 글로 썼지만, 분명 내가 놓친 수많은 아침들이 있을 테고 저마다의 아침도 다를 터다. 오늘의 인터뷰는 소중하지만 그 이외에 내가 흘려보낸, 미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반면교사로 깨달으면 된다. 책에 적힌 글은 먼지다. 틀린 말 아니다. 그러니까 소중한 거다.

그 시간에 거기에 있는 사람

- <아침창>에서 많은 청취자로부터 ‘아저씨’로 불렸다. 찾아보니 산울림 데뷔 때부터 팬들에게 아저씨로 불렸더라.

= 아저씨라는 호칭을 좋아한다. 24살부터 아저씨라고 불려 거부감이 없다. 계속 아저씨이고 싶은데 요샌 어딜 가면 할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기분 나빠. (일동 폭소)

- <씨네21>의 표지를 찍은 1998년 149호 기사를 읽으면 ‘10대와 20대는 김창완을 DJ로 알고 30대와 40대는 김창완을 탤런트로 인식한다’는 문장이 있다.

= 오히려 지금 10대와 20대는 나를 가수로 인지한다. 지난해 2023 인천펜타포트락페스티벌(이하 <펜타포트>) 이후로 젊은 친구들이 “저 아저씨가 가수였다니!” 하며 의아함과 자부심을 가진 채 내 공연을 찾는다. SNS를 하지 않고 반응도 살피지 않으니 보니 젊은이들이 그렇게 댓글을 달며 무대를 회자해주었다는 소문을 나중에 들었다. 관객층이 달라진 게 보인다. 팬이라고 하기도 너무 어린 친구들이 오는 중이다.

- 일각에선 <펜타포트>는 만 65살 이상 무료입장이 가능한데 65살이 넘은 김창완이 헤드라이너로 섰다며 놀라는 반응도 많았다.

= 또 가야겠네. 좋은 일이다.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외국의 록페스티벌이 국내에 별로 소개되지 않았다. 상대와 어우러져 즐기는 페스티벌이 우리나라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꿈이 있었는데 현실이 됐다. 우리나라 밴드가 무대에 설때 외국 밴드 못지않은 환영을 받는 모습도 자랑스럽다.

- 고양이 밥 주는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한다.

= 길고양이들이 워낙 수명이 짧다. 책에 실린 고양이들은 최근 우리 집을 방문하는 고양이들이다. 왔다 스치는 친구들이 몇 있지만 요샌 두 마리가 온다. 아빠 고양이 그리고 아들 아니면 딸 고양이인데 나는 그냥 아들이라 우기고 싶다.

- 책을 읽다보면 짝을 이루며 살기, 타인과 온기를 나누며 공존하는 삶을 향한 바람이 담긴 글이 몇차례 등장한다. 팬데믹 이후 개인화에 익숙해진 독자에게 여러 생각 거리를 던진다.

= 굴곡진 시간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건 무언지 팬데믹이 지나면 해결책을 얻을 수 있을 것같았다. 많은 이들이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있을 거라, 모두가 다 모일 수 없는 현실이 가져다 주는 절망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오히려 모두가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그전엔 사람들이 서로 만나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었는데 그런 갈증도 이젠 사라졌다고 보인다. 서로 나누어야 할 마음이 각자의 몫으로 돌아가버렸다. 유대가 강화되기보다 느슨해졌다. 팬데믹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요즘엔 모래알처럼 흩어진 사람들이 휴머니티로 다시 뭉치는게 아니라 AI가 조합해 만들어낸 사회에 일원으로 뭉치게 될까 두렵다.

- <아침창> 마지막 생방송에서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를 라이브로 연주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많이 기사화됐다. 이 노래를 선곡한 이유는.

= 그 곡은 드라마 한편을 끝내고 그간 고생한 스탭들과 배우들을 위해 만든 노래다. 그게 내 심정이니까 불렀다. 그런데 방송이 끝나면 그만해야 하는데 눈물 장사를 하는 바람에…. 방송은 생방송으로 나갔지만 그걸 전부 녹화해 끝까지 회자되도록 만드는 건 좋지 않다. 괜히 리포스트하게 만들고 말이다. 아무리 슬프대도 방송이 끝나면 끝난 것이다. 생방송만으로 여운을 남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남아 계속 이야기를 만드는 건 안된다. 사람들이 내가 노래하다 우는 ‘짤’이 돌아다닌다고 하여 뒤늦게 알았다. 악마적으로 편집됐을까 싶어 안 봤다. 그런 식으로 영상이 돌아다니면 다들 큰일난 줄 알고 볼 것 아닌가.

-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시대다. 또 하고 싶은 말을 발화할 수 있는 플랫폼도 다양하다. 하지만 라디오는 이 노래가 꼭 들리길 염원하는 마음으로 신청곡을 써내고 사연을 담아 DJ에게 전한다.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사연과 노래를 매일 마주하는 시간은 어떤 삶인가.

= 라디오가 갖는 현장감이 특별하다. 라디오는 청각 매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라디오만이 청각에 호소할 수 있는 지점도 있다. 내가 늘 강조 하는 덕목이 있다. 라디오 DJ는 그 시간에 거기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만 지켜내면 된다. 가상현실 시대다 보니 그 시간에 거기에 없다고 선언하는 녹음방송도 있다. 하지만 생방송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이 내 옆에 있다, 내 곁에서 속삭여준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대일 매체다. 마지막 생방송 오프닝 멘트에도 썼지만, 어느 식탁에 불쑥 나타난다거나 어느 잠자리에 불쑥 나타나는 게 라디오의 매력이 아닐까.

삶에서 맡는 예술의 향기

창완이 그린 <종소리>. 베솔을 먹물에 묻힌 뒤캔버스에 부딪히며 그린 그림이다.

-9년 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언제쯤 영화에 서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여전히 영화 출연작이 없다. 동일한 질문을 다시 건네고 싶다.

= 그 뒤로도 영화를 한 적이 없네. 장르를 구분하자는 건 아니지만 영화가 유독 특별한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흑백영화를 좋아한다. 버스터 키턴이 나온 <제너럴>(1926) 같은 작품도 좋아하지만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2011) 같은 작품도 잊을 수 없다. 로버트 J. 플래허티가 만든 <북극의 나누크>(1922) 같은 다큐멘터리는 내가 평생 가지고 갈 영화다. 요즘 나오는 영화에선 맡을 수 없는 향기들이 있다.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내러티브의 감동도 옛 영화에서 많이 느낀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현실 감각이 넘치는 영화들, 현실감을 주려 노력해 만드는 영화들이 훨씬 더 비현실적이라 느낀다. 만화영화만 해도 나는 3D애니메이션은 거의 혐오한다. 2D가 좋다. 최근 일본인 감독이 연출한 한 드라마에 카메오로 나갈 일이 있었다. 그때도 감독에게 “내 연기가 2D로 보였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나의 연기가 핵심 언어만 전달하는 정도면 좋겠다.

- 허우샤오시엔의 <동년왕사>(1985)를 좋아한다고도 했던데.

= <동년왕사>에 구슬치기하고 또 구슬을 숨기는 장면이 있다. 어린 날 추억과 연결이 돼 좋아했다.

- 최근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치매로 은퇴를 공식화했다. 기억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매체에서 명작을 남긴 감독이 기억이 쇠잔해지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다.

= 그런 어른이 은퇴 결정을 한다는 자체가 어른스러운 면모고, 세상에 훌륭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본다. 그런데 영화가 기억 보존에 유리한 매체인가. 나는 가장 불편한 매체일 수도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화는 상영을 전제하지 않나. 기계적인 프로세스가 있어야 틀 수 있는 매체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시청각으로 대표되는 영화적 요소인가. 아니다. 촉감일 수도 있고 단 한장의 스틸일 수도 있다. 영화만이 포괄적으로 모든 걸 담지 않는다. 기억을 추동할 수 있는 요소는 많다. 보존만 할 거라면 차라리 벽화가 나을 수도 있다.

- <하얀거탑>을 시작으로 <세계의 끝> <밀회> <밥 잘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까지 안판석 연출의 드라마에 줄곧 출연했다.

= 안판석 감독의 우물의 물 같은 목소리가 좋다. 그리고 그 목소리로 사람을 설득할 때가 좋다. 나는 설득당하길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다. 누가 무얼 말하면 한번 비틀어 다시 생각하는 종류의 사람인데도 그이를 만나면 기꺼이 설득당하고 싶다. 안판석 감독의 설득이 안판석 작품의 모든 것이다. 솔직히 어떻게 찍힐지는 내 관심 밖이다. 하지만 그의 설득이 백마디 위로보다 좋다. 안판석 감독이 “형” 하고 부르면 ‘내가 뭘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부터 바로 드는데 그때부터 기쁘다. 무언가 잘못됐지만 하여간 이젠 잘되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긴다.

- 많은 예술가들이 김창완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이야기한다.

= <아침창>의 마지막 생방송날, 이상윤 배우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가끔 메신저나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깜짝 놀랐다. 왜 죽을 때 삶이 주마등처럼 스친다고 하지 않나. 그때 죽기도 바쁜데 나쁜 놈 떠오르면 되겠나. (일동 폭소) 좋은 사람이 떠올라야 한다. 싫은 사람 욕하면 나중에 그 사람 닮은 사람 꼭 만나게 되어 있다. 일 에 도움이 안된다. 천국으로 가려다가도 우회 전하는 셈이다.

- 뮤지션, 배우, 화가, 작가 등 예술의 각종 분야를 모두 거치며 살아왔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겪은 불운 혹은 불행을 질료 삼아 예술을 수행한다는 편견이 있는 것 같다. 건강한 일상을 사는 중에도 예술이 나올 수 있다고 믿나.

= 아유, 한가한 소리다. 예술이 나올 정도로 삶을 살면 좋겠다는 말은 악담이겠지. 다만 삶에서 예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후각, 그런 감각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게 어디 있나. 그러니까 오죽하면 예술을 하며 사는 거다. 나 역시 언젠가 한 스님에게 “도를 많이 닦으셨으니 극락 왕생하시겠다”고 말하니 "여보시오, 내가 오죽하면 스님을 하겠습니까”라는 답을 들었다. 그냥 살아도 음악과 미술이 절로 나오면 무엇하러 예술가로 살겠나. 내 평생 소원이 벽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 심리적 벽을 시각화해 그리는 게 내 목표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벽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 벽을 뛰어넘는 심리의 벽을 만들고 싶기 때문에 힘든 거다.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다. <종소리>라는 그림을 그린적 있다. 깊은 산속에서 울리는 범종의 소리를 그리고 싶었다. 100호짜리 캔버스에 정신없이 그림을 그린 후 벽에 걸어놓으면 종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웬걸,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스스로 실패했다 생각해서 창고에 <종소리>를 처박아두었다. 그런데 9개월 뒤 생각해보니 소리는 사라지기 마련이더라. 계속 울리면 그건 소리가 아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내가 범성(梵 聲)을 잡았다 싶었다. 그림을 그릴 당시 종소리가 만드는 맥놀이를 정신없이 그리다 그만 물감이 튀어 캔버스에 깨알만 한 점이 찍혔다. 그래서 흰 물감으로 지우려다, 말았다. 그 점이 곧 나 같아서. 큰 소리가 존재하다 사라지고, 맥놀이가 생기고, 그 사이에 있는 점. 그 점은 멀리서는 안 보이지만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서야 지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지울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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