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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1)
2002-06-14

“누가 내게 끝 좀 보여줘!”

<비밀>에서 <베일>로, 다시 <예스터데이>로. 제목이 바뀌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관객을 만나기까지 최소한 몇년의 시간을 야금야금 베어먹는 것은 영화의 어두운 숙명일지도 모른다. 과장도 엄살도 아닌 현실. 기획에서 촬영종료까지 3년여의 시간이 걸린 <예스터데이>도 그 현실을 비켜갈 순 없었다. 애초에 작은 영화로 기획되었던 <예스터데이>는 제작비 80억원짜리 블록버스터가 되면서 감독의 ‘고난지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고 결국 촬영기간 9개월, 촬영횟수 112회를 기록했다. 관객과의 조우를 앞둔 <예스터데이> 감독이 털어놓는, 현장에서 생긴 일들. 편집자

감독을 존중한다, 제목은 <예스터데이>!1999년 5월 혹은 6월│프롤로그

1999년 5월인가 6월의 어느 날- 아! 그날은 명동에서 스크린쿼터를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삭발 집회가 있었다- 삭발한 안병주 미라신코리아 대표를 처음 만났다.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거기엔 또 그 이전의 역사가 있다. 이 연출일기를 영화로 본다면 첫 장면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몇 년간 감독 데뷔를 실패하고 공전을 거듭하던 나는 당시 준비하던 <레인트리>라는 영화가 또 장기전에 돌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본능처럼 예감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원더풀데이즈>와 <레인트리> 때문에 나와 2년 이상 같이 작업을 하던 그 영화사는 미라신코리아와 같은 건물에 있어서 가끔씩 미라신코리아의 기획실 이유진 실장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곤 했었는데 어느날 그녀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동안 내가 쓴 시나리오를 좀 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며칠 뒤 시나리오를 본 이유진 실장은 나의 사정을 묻고 듣더니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을 다룬 심리학자의 리포트를 모티브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인 <비밀>이란 영화를 진행하고 있는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비밀>은 실제 일어난 민감한 사건이라는 점,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호소하는 세련된 추리물이길 원하면서 막상 무대는 평범한 시골마을이라는 점, 비극적인 아이들의 실종을 소재로 그저 단지 스릴 넘치는 오락물을 만들 수 없다는 점 등 영화화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이유진 실장은 나의 지적에 공감한다며 <비밀>을 맡아줄 것을 권했다. <비밀>이 어떻게 다르게 바뀌든 나에게 전권을 준다고 약속하며, 아니 바뀌어야 한다면서. 빈털터리에 신인인 나는 돈도 필요했다. 좋은 영화 몇 작품 해본 영화사라는 크레딧도 필요했다. 무엇보다 일을 하고 싶었고, 멋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안병주 회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예스터데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원래 제목은 <비밀>이었는데, 박기형 감독이 <비밀>이란 영화를 만드는 바람에 제목이 가제 <베일>로 바뀌었다. <텔미썸딩>이 개봉한 뒤 미스터리 스릴러에 대한 우려의 소리도 높아져 있었다. 초고가 나오고 회의를 하고 또 2고가 나오는 사이 이미 한번의 더위가 지나고 겨울이 와 있었다. 징그러웠던 시나리오 수정과정을 거치면서 나다운 <베일>을 생각다 못해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근미래 SF로 설정을 바꾸었다. 안병주 대표도 SF라는 상업적 설정을 즐거워했다. 하지만 작고 꽉 찬 밀도의 <베일>이 갑자기 덩치 큰 블록버스터로 변한 것이다. 제작 주변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연기자와 파이낸싱 등 모든 게 더 높은 상업적 기대수준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2000년 11월 여자주인공 김희수 역으로 김윤진을 만났다. 그녀는 흔쾌히 이 작품에 참여하기로 했고 또 시나리오 수정과정에 의견을 주는 적극성도 보였다.

그 사이 제목에 대해 <베일>과 <예스터데이>를 두고 수없이 많은 저울질이 오갔다. 연출자인 나의 입장은 단연코 <예스터데이>였다. <베일>이란 제목은 쉽지만 사건을 풀어헤치는 실마리와 이야기의 표면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예스터데이>는 언뜻 모호하지만 인물들의 내면과 행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어차피 이 영화는 할리우드식의 외공이 강한 볼거리 위주로 만들어지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영화의 경우 설정을 아예 애매하게 하고 가야 한다. 알 수 없는 시간, 무국적의 애매한 장소. <예스터데이>라는 제목에는 그런 여백이 있다. 어느 봄날 안 대표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결론을 내려주었다. 감독을 존중한다. 예스터데이. 시원했다.

우연인지 제목이 결정되고 일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최민수가 조연격인 골리앗 역할을 하겠다고 수락한 것이다. 최민수에 대해서 주변에서는 골리앗으로는 적역이지만 같이 작업하는 일 자체에 대해 우려를 많이 했다. 워낙 에고가 강한 배우라…. 하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인가! 그리고 김승우를 석으로 정했다. 김선아와 정소영도 합류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투자자들이 붙기 시작했다.

“신이여, 지난 날은 다 거시기 하고 날좀 도와주소”2001년 6월9일, 서울 신사동 대림아파트 모델하우스│크랭크인

솔직히 중고 신인이라 신인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긴장이 됐다. 촬영장소는 모델하우스. 나를 본 김승우가 친근한 농담을 건네왔다. 진짜 오래 기다렸나보다. 첫 촬영에서 이렇게 농담 주고받는 여유있는 신인 감독 첨 봤다고…. 몰래 아무도 없는 모델하우스 2층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등돌리고 지낸 사이인 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신은 나에게 무슨 다른 뜻이 있는지 몰라도 사사건건 세상과 가족과 갈등을 빚게 하고 나를 마치 현실 부적응자처럼 만들어놓았었다. 나는 심지어는 머피의 법칙에 시달릴 만큼 그 부분에 자격지심마저 갖고 있었다. 절대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런 치졸한 수법으로 신이 나에게 굴복을 요구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라도 굴복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 내가 기도를 했다. 협박성 기도였다. 그동안 당신과 나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었다면 지난일은 다 거시기하고 날 좀 도와주십쇼. 더도 말고 나 준비한 만큼 우리 애쓴 만큼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촬영이 시작되고 석의 방. 김승우와 무척 오랜 형, 동생 사이처럼 친근한 분위기에서 끝냈다. 석의 집. 최민수가 욕심을 좀 부린다. 받아주었다. 더 찍어놓고 보면 손해 볼 건 없을 것이다.

다음 촬영은 희수의 차 안. 끔찍하게 악재가 겹쳤다. 항공사 파업, 호텔의 촬영불가. 리무진의 펑크. 그런데도 일본에서 김윤진 취재를 나와서 할 수 없이 테스트 겸 찍었다. 김윤진이 약병 소품이 좋지 않다고 지적한다. 옳은 말씀. 결국 쓰지도 않을 장면, 스탭들 괜한 고생만 시켰다.

미안해서 더 잘 해보려고 했는데…6월16일, 안성 미리내 성당과 양재동 다리변 카페│2차 촬영

성당은 영화의 시작을 여는 첫 중요한 큰 그림이다. 1차 촬영 때 잡혀 있던 분량이라 그날 먼저 안성에 내려왔던 전무송 선생은 이미 한번 바람을 맞은 터였다. 미안한 마음에 더 잘해보려고 하는데 성당이 미리내 김대건 신부 순교지라 성지화되어 있어서 무척 진행이 조심스러웠고 어려움도 많았다. 첫컷은 타바코 필터를 써서 늦은 오후, 혹은 과거 같은 느낌을 주었다. 특수효과가 아직 계약이 안 돼서 연출부가 스모크를 뿌렸다. 안쓰럽다.

현실에서 가능한 많은 미래의 이미지를 담자8월20∼22일, BEXCO 옥상, 외부│18차 촬영

운동장처럼 넓은 콘크리트 옥상은 잘 달궈진 프라이팬이다. 하얀 바닥에 정면으로 반사되는 일광과 열을 막아보려고 제작부 영준이와 특효팀이 소방호수를 동원해 계속 물을 뿌려댔지만 리허설에 뿌린 물이 슛 들어갈 때 마를 지경이다. 부산 전시 컨벤션센터의 뒤편에서 본 건물은 기하학적이면서 그림같이 푸른 하늘과 무척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 이런 특징은 꼭 살려야 한다. 미래적인 느낌을 되도록 CG에 의지하지 않고 담아낼 수 있는 한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망원 렌즈를 많이 써서 인물 위주의 숏, 혹은 종군기자의 눈 같은 뉴스릴 타입의 현장감을 강조하는 이 영화 성격상의 문제를 배제하고 와이드 렌즈의 앵글을 썼다. 청장의 납치극이 벌어지는 현관 입구를 비롯해 몸 숨길 그늘이 없는 그 주변은 세컨드 카메라의 위치까지 고려해 촬영상의 이동거리로 치자면 500m가 족히 넘는다. 한컷을 찍고 다음 컷 순서를 한번 잘못 판단해 갔다 돌아올라치면 좀 과장해서 시간은 반나절이고 스탭들은 잘 익은 구이가 된다. 촬영장에서 항상 곁에 있는 스크립터 지연이가 어느 순간 선글라스를 벗어버렸다. 이미 늦은 짓이지만 타다못해 기미가 낀 얼굴에 선글라스 그림자가 더 흉하게 남기 때문에….▶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1)

▶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2)

▶ 정윤수 감독이 쓴 <예스터데이> 1000일의 제작 기록(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