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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이상한 경향, 코드5 - 난무하는 가학과 엽기
2001-03-26

칸트와 함께 사드를? 사드와 함께 칸트를!

400번의 구타를 통해 성장을 쟁취하는 프랑수아 트뤼포식 애증의 학교가 낯간지러운 자본주의와 만났을 때, 여자는 권투주먹에 처참하게

맞으면서도 남자에게 한번 더 핸드폰을 ‘때려’ 줄 것을 간청한다. ‘400번의 핸드폰’이라는 피학적 존재 호출에 달뜬 엽기적인 그녀는 아마

남자 친구에게 자기가 오늘은 술 한잔을 ‘쏘’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사격과 사정이 혼동되고, 가학과 피학이 전도되며, 메시지가 마사지가

되는 엽기문화의 흔적들.

엽기 , 열정이 아닌 유행

모두가 행복하게 끝나야 하는 영화 <해피엔드>의 행복이 종치는 마지막은 최보라의 불륜에 보복하는 서민기의 잔혹한 살해 축제였다. 그것을

축제라고 하는 까닭은 최보라의 살해 신이 단지 최보라를 죽이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반복된 칼부림을 통해 분출하는 광폭한 충동 자체에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반면 김기덕 영화에서 섹스를 본다는 것은 고통과 허기가 뒤범벅된 관계의 극한까지 가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목

안에 낚싯바늘을 넣고 피를 토해가는 남자와 소유를 위해 질 안에 낚시 바늘을 넣는 여자. 세상의 폭력에서 상처받은 주인공들은 또다시 강간과

살해와 자해라는 가학과 피학과 구원의 삼위일체에 몸부림친다.호러영화의 게임의 규칙이었던 엽기와 가학이 어느덧 문화적 유행이 되고, 한국영화의

일반화된 법칙으로 정착되고 있는 이즈음. 엽기 버스터라는 황당무계한 이름을 단 영화는 보험금을 위해 망치로 손을 내려치는가 하면 보리차에

독약을 타고 일가족이 모두가 투신자해(?)의 음모를 꾸며도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의 폭력은 공동의 죽음을 향해 치닫는 자살 사이트의 유행에서도 이미 나타나듯이 서로에게 소외당한 이의 가장 치열한 자기 확인이자

보복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여기서 가학과 피학성이란 원래 사드가 의도했던 전체주의적 집단체제에 대한 개인 욕망의 극대화와 극단화를

통한 상징적 저항과는 애시당초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여성의 음모 같은 수풀로 되돌아가는 <섬>의 마지막이 이미지화하듯이 그것은 리비도와

타나토스가 함께 뒤엉킨 무의식으로의 퇴행. 그렇지 않다면 여자를 강간해도 사람을 살해해도 혹은 강도짓을 해도, <해피엔드>와 <섬>과 <주유소

습격사건>의 주인공들은 누구 하나 법망에 걸리는 결말이 왜 없을까? 작금의 한국영화가 만들어 내고 싶어하는 장르는 필름 누아르나 갱스터

무비가 아닌 드라마라는 이름을 가진 호러이던가? 인질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뺨을 때리게 하고 라이터 불 하나로 주유소와 그 일대를 몰살하겠다는

위협을 하고도 태연히 새 삶을 보장받는 <주유소 습격사건>의 가치체계는 비도덕이라기보다는 무도덕에 가까운 것이다.그것은 관객에게 일회적

충격을 가하면서, 흥행상의 센세이셔널리즘을 보장받으면서, 일탈과 방종의 면책특권을 잠시라도 맛보게 해주겠다는 120분 동안의 손쉬운 유혹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학과 엽기의 발화점에는 2000년 여름을 달구었던 <가위> <하피> 등의 숱한 호러영화들의 전승계보가 다시 한번 있어 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많은 공격성은 ‘내’가 아닌 모든 것은 ‘나’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나르시시즘적일 것이다. 거세,불구,절단,탈구,내장

적출,삼키기,신체의 파열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인간은 파편화된 신체를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면서 육체의 통일성과 영속성을 갈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 영화의 가학-피학성은 소외된 자아의 틈에서 피어나는 일종의 악의 꽃이며, 도착적인 집단 히스테리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야만스런

축제의 장이다.

잔혹함 - 체념과 퇴행의 그림자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착적 공격 욕구는 다양성이라는 문화적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젊은이들의 저항과 일탈의 심리적 틈 사이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을 넘어선 도덕’이기 때문에, 거친 심리적 에너지의 일회적 분출이자 본능적인 행위라는 미명하에 책임도

죄의식도 느낄 필요가 없다고 강변되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거대한 아노미, 가치의 혼돈일 뿐이다.

그러니 이미 자크 라캉이 ‘칸트와 함께 사드를’이라고 주장했다면, 실천 이성을 통해 욕망할 수 있는 자유를 구현한다면, 이제는 제발

‘사드와 함께 칸트를’. 대한민국 영화에서 자행되는 살해와 자해의 축제 속에는 현실의 잔혹함을 또다른 잔혹함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는 체념과

퇴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심영섭 /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이 글은 2000년 가을 <세계의 문학>에 실린 `문명과 히스테리’를 참조하고, 필자의 글 <영화에 나타난 공격성과 히스테리의 양상>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