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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미니즘과 그 사회주의(3)
2002-06-19

신현준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콩글리시다. 콩글리시라는 말이 경멸적인 뜻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무언가 어의전성이 있다는 뜻이다. ‘페미니즘’이라고 표기하는 사상적 지향의 실체는 알파벳으로 ‘feminism’이라고 표기하는 것과도 다르고, ‘여성주의’라고 한글로 번역해서 표기하는 것과도 다르다. 따라서 ‘페미니즘’이라는 한글 단어 앞에 ‘자생적’이라거나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는 없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서양적인 것도 아니고 한국적(혹은 동양적)인 것도 아니고 양자의 하이브리드(잡종)이다. 페미니스트의 선구자라고 할 만한 나혜석이나 이영도의 경우도 서양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 사이의 잡종이었다.

이건 말장난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이런 말장난은 중요하다. 즉,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의 이미지는 좀 다르다는 이야기다. 사회주의를 ‘소셜리즘’이라고 표기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이 단어가 충분히 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체로 ‘한국인’의 형상을 취하고, 성별은 대체로 ‘남성’이다. 이들 대부분은 ‘외래’, ‘서양’문화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강직한 민족주의자의 이미지를 풍긴다. 민족주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는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민족 구성원 내부의 차이와 개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보일 때면 다소 불편하다. 특히 ‘스트레이트’(straight)하고 ‘스퀘어’(sqare)한 면모를 보일 때는 불편함이 더해진다. 한 예로 마초들의 잔치인 월드컵 축구에 대한 ‘진보 언론’의 기사를 읽다보면 ‘이거 진보 맞아?’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나에게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는 금발과 홀쭉한 얼굴, 깡마른 몸매를 가진 서양 여자다. 속된 표현을 쓴다면 ‘양년’의 이미지다. 그렇지만 영화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아찔할 듯한 미모를 가진 여배우 같은 이미지는 아니다. 속된 표현을 한번 더 사용한다면 ‘잡년’의 이미지다. 성적으로 개방적인 것은 기본이고 성적으로 모호하고 ‘변태적’이라는 게 페미니스트에 관한 지배적 이미지다. 즉, 페미니스트는 관습적인 여성성(feminity)을 부정하는 존재이고, 나름의 윤리는 확고하지만 ‘모럴’하지는 않다. 그래서 나에게 페미니스트는, 성녀부터 마녀에 이르는 여성성의 스펙트럼에서 성녀보다는 마녀에 더 가깝다. 요즘은 얌전해졌지만 한때의 마돈나 같은 ‘마초적 페미니스트’는 공포스럽기조차 하다.

아, 실수했다. 이상의 이야기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feminist’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때로 도발적이기는 해도 극단적이지 않다. 물론 극단적인 게 꼭 좋은 건 아니다. 어쨌든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렇듯 한국의 페미니즘은 잡종적이고 중용적이다. 성적으로 모험적이지만 ‘위반’의 수준에는 잘 이르지는 않고, 서양의 사상에 민감하지만 한국이라는 환경을 잊지는 않는 것 같다(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그래서 사회주의자와 달리 페미니스트는 국제주의자로 보인다. 이건 나의 최근의 문화적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므로 페미니스트가 ‘쿨’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셈이다. 물론 페미니즘이 섹슈얼리티면에서 조금 더 도발적이고 위반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그게 공론화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지만, 이건 국외자가 함부로 할말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쿨함이 ‘한국 정치’라는 문제를 만나면 꼬인다는 점이다. 현재 페미니스트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양상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문제제기에 가깝다. 그렇다면 내 생각에는 여기서 페미니즘이라는 타이틀은 사족으로 보인다. ‘전근대적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근대적 여성운동’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족해 보인다는 이야기다. 한국형 마초의 화신인 정주영의 아들과 무언가를 해보려는 여자를 지지하는 것은 여권 신장면에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건 ‘진보정당의 보수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나 똑같다. 차라리 박근혜와 김현옥(!)과 이미경과 추미애를 한데 모아서 민주여성당(가칭)을 창당하여 앞으로의 선거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대한남아’로서 약속하건대 나도 한표 찍겠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사안에 나처럼 나이든 남자는 일말의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반면 ‘젊은 여자애’들은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아닌가? 신현준/ 성문화 연구자 http://homey.w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