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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같은 언어로 존재의 시를 쓰다
2001-03-27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11 김대우(1962∼)

평범한 가정주부 서현 앞에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난다. 바로 그녀의

여동생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젊은 청년 우인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가 자신의 영혼의 짝임을 알아보고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든다.

연상의 유부녀와 연하의 청년이 나누는 불륜의 사랑? 컨셉만을 따지자면 진부하고 빤한 멜로영화가 될 것 같지만 <정사>는 그런 선입견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간단히 배반한다.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대사와 정밀한 심리묘사 그리고 극히 절제된 세련된 연출로 이전의 한국멜로가 가닿지

못했던 눈부신 신개지를 펼쳐보였던 것이다. <정사>는 표피적인 섹스 대신 인간 내면의 심연에 주목한다. 그 시선이 더할 수 없이 허무적이면서도

드라이하다. <정사>의 작가 김대우는 말한다. “가정이냐 사랑이냐 하는 도식적인 이분법 대신 서현 내면의 본질적 문제를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노쇠와 소멸에 대한 공포였지요.”

김대우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은 한국외대 이탈리아어과를 졸업한 다음

프랑스고등영화학교(ISEC)에 재학중일 때였다. 궁핍하고 외로운 유학 시절이 계속되자 함께 온 아내는 향수병에 걸려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졸라댔는데 그에게는 비행기티켓을 끊을 돈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공모에서 당선되면 그 상금으로 아내에게 귀국행 항공권을 사주려고” 쓴

시나리오가 <슬픔에 찬 성모는 서 있었다>였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 이 작품은 1991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공모에 가작으로 뽑혀 그들

부부에게 귀국행 항공권을 안겨줬다. ISEC를 졸업한 김대우는 한국으로 돌아와 영상작가전문교육원 1기 과정을 마친 다음 다시 한번 같은

공모에 도전하여 기어코 당선의 영예를 쟁취하는 승부근성을 보인다. 1993년의 공모당선작인 <얼음물고기>는 이후 만 6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송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

김대우의 시나리오 데뷔작은 그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유동훈의 지휘하에

집필한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 역시 같은 교육원의 동기생으로서 훗날 <닥터봉>(1995)을 쓴 육정원과 크레디트를

나눠가졌는데, 코믹터치의 가벼운 트렌드물로서 그다지 이목을 끌지는 못했다. <해적>은 여수를 중심으로 험한 뱃사람들의 세계를 다룬 김중태의

장편소설을 각색한 것이고, <용병 이반>은 탤런트 박상원을 기용하여 러시아 올로케로 제작된 액션물인데 모두 흥행에서 참패했다. 전작의 후광을

업고 제작된 신씨네의 기획영화 <결혼이야기2>와 일본을 배경으로 깡패이고 싶지 않은 깡패와 깡패가 되고 싶은 보통남자의 우정과 갈등을 그린

<깡패수업>는 비교적 성공적인 흥행작이다.

김대우가 개성있는 시나리오작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역시 <정사> 이후다. <정사>에서 보여준 인간 심연의 드라이한 탐구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작품이 <송어>인데, 실제로 이 시나리오가 쓰여진 것은 그로부터 6년 전이니, 그만의 개성적인 작품세계는 일찌감치 형성돼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송어>는 평범한 듯 보이는 인간들의 내면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폭력성과 광기가 숨어 있는가를 냉정하게 해부하여 보여주는 잔인한 영화다.

국내에서는 극히 드물게 시도되는 심리스릴러라는 장르에 속하는데, 그 비우호적인 진실이 너무도 섬뜩해서인지 저조한 흥행기록을 남겼고, 비평에서도

호오(好惡)가 분명히 갈렸던 문제작이다. 박종원 감독은 이 작품의 제작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시나리오에서 스크린까지>(집문당, 1999)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충무로에서 영화만들기가 얼마나 고난에 찬 일인가를 구체적인 사례분석을 통해 증언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김대우는 시나리오작업에 병행하여 가끔씩 장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한다. 오리지널 소설인 <비만의 도서관>(민음사, 1997)이 전통적인 소설작법을

따르고 있다면, 각색소설인 <정사>(은행나무, 1998)는 영화와 소설의 퓨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회화적인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나하고는

비슷한 연배인데다 통하는 데가 많아 이따금씩 어울려 술을 마시곤 하는데 만날 때마다 새로운 옷차림을 선보이는 댄디보이이기도 하다. 염색한

머리에 고글을 걸치고 찢어진 청바지와 세련된 슈트가 모두 어울리는 걸 보면 대단한 패션감각이다. 그 패션감각만큼이나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작품세계를 펼쳐나가길 기대한다.

심산|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93년 김호선의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 ⓥ

1994년 박성배의 <해적> ⓥ

1994년 김강노의 <결혼이야기2> ⓥ

1996년 김상진의 <깡패수업> ⓥ

1997년 이현석의 <용병 이반> ⓥ

1998년 이재용의 <정사> ⓥ ★

1999년 박종원의 <송어> ⓥ ★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