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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권력을 향해 질주하다
2001-03-27

정난정의 일생 그린 대하사극 <여인천하>

<여인천하> SBS 월·화요일 9시55분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MBC 대하사극 <조선왕조 오백년> ‘풍란’편(1985·유길촌 연출)이나 같은 방송사의 <교동마님>(1988·표재순

연출)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요즘 SBS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여인천하>(김재형 연출)의 ‘난정’이 그닥 낯설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난정모로 출연하고 있는 김영란은 앞서 두 작품에서 직접 정난정 역을 연기한 배우이기도 하다.

모두 월탄 박종화가 쓴 <여인천하>(1960)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이번 작품은 그의 탄생 100주년과 서거 20주년에 맞추어 제작되었기에

그 포부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원작을 취했다 해도 물론 그 맛은 조금씩 다르다. 앞의 두 작품이 문정왕후의 권력 찬탈과 그에

따른 당파싸움에 초점을 맞췄다면, SBS의 <여인천하>는 문정왕후의 장자방 역할을 하며 20년간 권세를 누리다 몰락하는 정난정이라는 여인의

개인적인 삶과 사랑에 주목한다.

실록은 두줄, 허구는 8회

정난정은 실제 인물이긴 하나, 그녀의 이야기는 조선왕조 실록에 딱 두줄 언급돼 있을 뿐이다. 따라서 8회에 걸쳐 방영된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윤원형의 정실부인이 되어 권력을 얻기까지의 궁중 암투는 온전히 작가가 상상력에 의존해 창작한 내용이다. 특히 어린 시절 서녀로

태어난 죄로 학대받는 과정을 세심하게 그려넣는 등 무조건적인 악녀로 비춰지는 것을 최대한 억제했다. 또한 극의 소구력을 높이기 위해 왕족의

신분이라는 출생 비밀을 덧입히기도 했다.

지난해 2월 기획한 뒤 캐스팅 부진으로 11월이 돼서야 본격촬영에 들어간 <여인천하>는 11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투자해 50회 분량으로

찍을 예정이다.86년 TV드라마 <이화에 월백하고>에 출연한 이후 16년 만에 브라운관을 방문하는 강수연과 사극 <조선왕조 오백년>에서

인현왕후와 장희빈 역할로 주목을 받았던 전인화 등 쟁쟁한 여배우들의 출연 결정이 연출진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얼마 전 중학생을 가르치는 한 학원의 사회 강사는 역사 드라마의 과도한 허구성과 그 영향력에 놀란 일이 있다. <여인천하>를 예로 들어

역사 이야기를 하던 차에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에 반박을 하고 나섰다.윤원형이 문정왕후의 동생이라고 하자 아이들은 드라마에도 왕후의 오빠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확인을 해보니 어찌된 일인지 극중인물의 설정이 잘못돼 있었다. 방송사에 전화를 해서 알아보니 드라마의 재미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설정을 했다고 대답하더란다. 얼마 전엔 파평 윤씨 집안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말라는 항의성 전화를 제작팀에

한 적이 있다.

이 일은 아주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역사드라마가 저지르기 쉬운 오류와 그에 대한 반향을 적절히 보여준다. 영상매체에 강한 청소년들이 딱딱한

역사책을 읽기보다 드라마로 꾸며진 역사를 택하는 지점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의 장이 될 것이냐, 아니냐의 선택이 사극 제작팀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단지 <여인천하>만의 문제는 아니다. 앞으로 속속 제작될 다른 모든 사극에 해당되는 일이다.

독해야 성공한다,시각불변의 법칙?

한편 기존의 사극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되풀이된 구중궁궐 여인네들의 치맛바람 싸움이 얼마나 신선하게 그려질지도 미지수다.

김재형 PD는 그동안의 사극에서는 여성들의 암투가 극의 잔재미를 더하는 곁가지 역할에 불과했으나, <여인천하>에서는 그것이 여성들의 엄연한

정치의 한 형태이자 역사의 한 부분으로 그려, 단순한 에피소드의 나열로 그치는 기존의 사극과는 분명한 차별점을 지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방영된 내용을 살펴보면 여인이 성공을 하기 위해 직업도 정조도 상관없다는 듯한, 게다가 독해야 성공을 한다는 식의 사고는

여전하고, 궁중 여인들의 ‘정치’ 역시 예전보다 좀더 살벌하고 리얼하다는 점 외에는 더 나아진 점을 찾기 힘들다. 점쟁이들을 앞세워 상대방을

음해하려는 모습은 변함없이 애용되는 장면이고, 게다가 시대배경과 관계없이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현대어 대사 역시 친근함과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라는

제작진들의 의도와는 달리, 극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리고 사극의 깊이를 얕게 하는 데 일조한다. 실상 <허준> 이후 ‘무거운 사극은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긴 했으나, 경쾌한 발걸음에 진실을 담을 수 있는 제작자의 지혜가 아쉬운 때다.

글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

사진제공 SBS 홍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