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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가 삼켜버린 순수의 시간
2001-03-27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안네의 일기>

Diary Of Anne Frank 1959년,

감독 조지 스티븐스

출연 밀리 퍼킨스

EBS 3월25일(일) 오후 2시

“질려버리겠군.” 1940년대 할리우드에서 조지 스티븐스 감독은 깐깐한 완벽주의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당시 영화 한 장면을 위해 열흘

이상 허비하는 것은 예사였다고 한다. 예산과 촬영일자를 무시한 채 영화를 찍는 감독에 대해 제작자들은 불만을 토로했고 낭비벽이 심하다고

수군거리곤 했다. 따라서 이후 조지 스티븐스 감독이 프로듀서를 겸임한 것은 불가피한 궁여지책이었다. 조지 스티븐스 감독은 직접 영화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멋진 인생>(1946)이라는 걸작이 탄생한 바 있다. 감독 조지 스티븐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선 스타시스템의 능란한 활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캐서린 햅번, 프레드 아스테어 등 감독은 배우를 발굴하거나

확고한 스타 이미지를 지닌 배우를 기용했으며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면서 고전기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안네의 일기>는 조지

스티븐스 감독이 제임스 딘 등의 스타를 써서 앤드루 새리스 표현을 빌리면 “미국인의 꿈에 관한 영화” <자이언트>를 만든 직후 연출한 작품이다.

1934년 여름, 히틀러가 집권하자 안네의 가족은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정착한다. 거처를 마련한 안네의 가족은 불안하지만

그나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나치군이 유대인에 대한 색출작업을 벌이자 다시 안네와 부모는 걱정스런 하루를

맞이한다. 안네의 언니가 나치에게 출두명령을 받자 가족들은 비밀스럽게 마련된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안네는 자잘한 일을 일기장에 적어가면서

공포스런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안네의 일기>는 원작에 충실한 영화다. 3시간에 육박하는 상영시간 동안 조지 스티븐스 감독은 안네

프랑크라는 한 소녀의 경험담을 스크린으로 가감없이 옮겨낸다. <안네의 일기>는 원작과 동일한 흐름을 갖고자 하는, 작품 속 ‘시간’마저

동일화하려는 의욕이 엿보인다. 안네의 가족이 은신처에 도착하고 죽음과도 같은 침묵의 시간을 보낸 뒤 나치에게 발각되는 이야기는 그 비극적인

정조에도 불구하고, 다소 지루해보인다. 같은 이유로 영화를 보노라면 장황한 무대극이나 소설을 끝까지 감상하는 듯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영화는 사운드의 활용에선 교과서 수준이다. 안네의 가족이 밀폐된 장소에 갇힌 상황에서 일상적인 소리에 거대한 공포를 느끼는 모습을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사이렌 소리에서 종소리, 거리 행인의 고함소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향이 안네 등의 인물에겐 치명적인 수준의 공포로 다가온다.

이들에겐 침묵 역시 독과 같다. 은신처에서 자신들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돌처럼 굳어지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정물의 서스펜스’라는 수식어를

달기 적당할 것 같다. 조지 스티븐스 감독은 이미 1951년작 <젊은이의 양지>에서 라디오 뉴스 등의 사운드를 배신당한 사랑, 그리고 극의

비장함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바 있다. 다락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희망에 들떠 있던 안네가 나치의 급습을 받고 불현듯 얼어붙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운드 편집의 묘미를 안겨 준다.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전작 <쉐인>을 상기시키는, 폭력과 순수성이 무자비하게 충돌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