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김혜준을 말한다
2002-06-28

우리의 물밑 과외교사

문성근 ● ● ●

┃배우·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

97년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를 처음 본 게. 아마도 한국영화연구소에 안성기 선배와 함께 이름을 끼워넣게 되면서 인사를 나눴던 것 같다. 빛도 못 보고, 욕만 먹는 자리인데도 용케도 버텨왔구나 싶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나 문화체육부에서 지원하는 연구 프로젝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늘 선정명단에서 배제됐는데, 그런 사정을 알고 나서부터는 이 사람이 뭘 먹고사나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 못 먹어서 저렇게 삐쩍 말랐구나 하고 웃고 말았지만. 그가 무척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정지영 감독 등과 스크린쿼터 감시단 활동을 하면서부터 뼈저리게 느꼈다. 깃발 들고 나섰지만, 뒤에서 논리적으로 백업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나. 자, 가자, 하고 영화계 현안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영화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까지 관심을 넓혀 문화정책 전문가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기적인 바람은 고시가 아니더라도 현장에서 잔뼈 굵은 그와 같은 이론가들이 정부 관료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한다.

김동원 ● ● ●

┃독립다큐멘터리 감독·푸른영상 대표혜준이를 만난 건 오래됐지. 나랑 같이 일을 한 적은 없어도, 인권영화제 일이나 영화진흥법 개정을 논의하는 세미나 같은 데서 자주 얼굴을 봤어. 술을 잘 안 먹는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야. 물론 처음 보면 여리게 보이고, 너무나 합리적이어서 답답할 때도 있어. 근데 뚝심 같은 게 있어. 중심을 잃지 않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일하게 되면서 독립단편영화 심의 거부 문제를 놓고 우리쪽과 다소 의견 차이를 보인 적은 있어도 여전히 믿을 만한 사람이구나 싶어.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그 친구가 전에 영화진흥법을 파고들 때 난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 근데 나도 음비법 위반으로 한번 옥살이를 하고 나오니까 아, 공부를 해야겠구나 싶더라고. 다들 대장만 하려고 할 때 묵묵히 뒤에서 연구해온 선각자라 할 수 있지.

조광희 ● ● ●

┃변호사·법무법인 한결영화계 사안을 두고서 변론을 할 때면 그가 정리해놓은 그간의 자료들에 기대 도움을 받은 적이 많다. 개인적으로 놀랐던 것은 그가 증인으로 법정에 섰을 때다. 상대 변호사가 거칠게 다룰 수도 있고, 법정이라는 공간 자체가 원래 불편한 곳이다. 그런데 어떤 질문에도 논점을 잃지 않더라. 언제나 자신의 입장이 잘 구축되어 있는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그 논리가 반복이나 환원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더 풍부하고 조밀해진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이론가지만, 강퍅하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 것도 그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검열문제만 해도 그렇다. 표현, 창작의 자유 같은 주제는 변호사들도 정치한 논리를 세우기가 힘든 사안이다. 그러나 그는 웬만한 변호사들보다 한발 앞서 있다.

이효인 ● ● ●

┃영화평론가·경희대 영상예술학과 교수언젠가 누가 와서 그가 요즘 텃밭 가꾸는 데 재미붙였다고 그러더라. 그래서 올해 한 일 중에 그게 제일 잘한 일이라고 그에게 전하라고 했다. 주위에서 불편할 수도 있을 정도로, 무슨 낙으로 사나 싶을 정도로 일에 매여 있는 스타일이다. 물론 그 어찌할 수 없는 타고난 성실성 덕을 보고 살아온 것을 부정할 순 없다. 민족영화연구소 시절, 그는 단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이성교제 근절이 철칙이었던 80년대 그곳이었지만, 지금의 부인과 연애할 때도 그가 밉게 안 보였다. 다 그런 미더움 때문이다.명계남 ● ● ●

┃배우·이스트필름 대표이창동 감독 데뷔시키겠다고 해놓고 영화사를 차리긴 했는데 막막했다. 어디 영화제작이라는 게 마음만으로 되는 건가. 들은 풍월만으로 메우긴 힘든 일이다보니 다급한 마음에 정지영 감독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놈의 충무로 판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고, 좀 알려달라고 했다. 그때 정 감독의 말은 “김혜준한테 가 봐”였다. 당시 같은 건물을 쓰고 있던 한국영화연구소 기획실장인 그를 찾아가면, 제작에서 배급까지 필요한 사항을 소소히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연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스크린쿼터 수호를 위한 영화인들의 집회에서 사회자로 나서 마이크를 잡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에게 신세를 지는 경우도 많아졌다. 여기저기 대학 등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왔는데, 다 김혜준에게서 알게 모르게 과외수업 받지 않았으면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안정숙 ● ● ●

┃한겨레 기자·<씨네21> 전 편집장

영화진흥법이건 스크린쿼터건 기사를 쓰려면 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해외 출장을 가서도 급한 일이 터지면, 그에게 팩스 넣고 전화 걸고 그랬을 정도니까. 한눈판 적 없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사생활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그에 대한 인상과 기억은 그게 전부다. 그를 영진위로 끌어들였던 건 이런 사람들이 주류로 들어와서 제구실을 해야 지원책이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반대도 심했다. 일부에서는 그를 주적으로 몰아세웠을 정도니까. 그들은 학계에 연구경력과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왜 하필 김혜준이냐고들 저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영화 정책을 만들고, 다듬는 데 있어 그의 머리와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그가 유일했다.▶ 한국영화 정책이론가,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장 김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