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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모든 것이 비평이다 - 1999년부터 <뉴요커>를 지키는 영화평론가 리처드 브로디

최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뉴요커, 100년의 이야기>(2025)를 통해 뜻밖에 사랑받는 인물이 있다면 1999년부터 <뉴요커>의 영화 비평 섹션 ‘프런트 로’(The Front Row)를 지켜온 영화평론가 리처드 브로디다. 비평가로서 타인의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 노력한다는 이 베테랑은 당면한 현재를 “영화 한편을 만드는 데는 수년이 걸리지만 그것을 파괴하는 데는 단 2분, 심지어 엑스(X)에서는 단 2초면 충분한” 날들로 묘사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처드 브로디의 하루는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거리에서 예스러운 방식으로 시작된다. 정확히는 35mm 필름의 유령들과 동시대의 전위가 공존하는 영화관 메트로그래프의 어스름한 입구에서다. 수전 손택이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영화의 쇠퇴’를 비관적으로 예고했을 때 브로디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비평적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쓰레기라 치부하는 저예산 코미디에서 영험함을 발견하고, 세련되게 포장된 주류 영화의 기만을 날카롭게 도려낸 그의 문장들은 뉴욕 시네필리아의 새로운 한 세기를 지속시켰다. 폴린 케일에 이은 <뉴요커>영화평론석의 상징인 그는 케일이 구축한 감각적 비평의 유산을 계승하고 취향의 절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다수가 찬사한 영화를 거부하고 대다수가 외면한 영화를 옹호해 ‘역주행의 비평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지만 그 불일치의 근저엔 “비평이란 영화예술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는 행위”라는 신념이 놓여 있다. 이를 위해 역설적으로 영화사의 파편들을 정교하게 엮어내려는 집념이 담긴 책이 704쪽짜리 고다르 전기 <모든 것이 영화다>(2008)다.

종이 잡지의 마지막 지박령 같은 인상과 달리 사실 그는 의외로 디지털 친화적이다. 틱톡과 인스타그램에서 60초짜리 영화 큐레이션 영상에 출연하고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동안엔 SNS에 칼날 같은 논평- “숀 펜은 뛰어난 배우이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는) 완전히 잘못 연출되었다”, “<기차의 꿈>은 잘못 각색된 영화”라는 비판 등- 을 생중계처럼 쏟아냈다. 그가 펼쳐든 동시대 영화비평과 종이 잡지의 지도는 어떤 형상일까. 여전히 매주 글을 쓰고 여전히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는 비평가에게 메일로 대화를 청했다.

<뉴요커, 100년의 이야기> 중 리처드 브로디.

- 한편의 영화를 보고 매체에 글을 발표하기까지 통상 어떤 방식과 경로를 고수하나.

영화가 내게 공개되는 시점에 가급적 바로 찾아보려 하는데 글을 쓰는 시점과 가까울수록 좋다. 개봉보다 한참 전에 봤다면 반드시 다시 본다. 그래서 글을 쓰기 전에 한편을 두번이나 세번 보는 일이 잦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의 열기 속에서 쓰는 것이다. 이전부터 서서히 발전시킨 아이디어를 리뷰에 반영하더라도 말이다. 가능하다면 극장의 큰 화면으로 보지만 집에서 컴퓨터로 보는 것도 나는 전혀 꺼리지 않는다. 두 경험이 만드는 차이는 영화마다 양상이 다르고 그 다름의 방식 역시 예측 불가능하다. 나는 내가 리뷰하는 많은 영화들을 극장에서 보는 관객보다 자신의 집에서 보는 관객이 많을 것이란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 <뉴요커>는 필자들의 개성 있는 논조와 독립적인 큐레이션이 돋보이는 매체다. 비평가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지, 전체 구성을 함께 조율하는지 궁금하다.

공식적으로 협업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방식은 꽤나 캐주얼하다. 동료 비평가인 저스틴 창, 편집자들과 함께 우리는 개봉예정 영화 목록을 살펴보고 나누어 맡는다. <뉴요커>는 필자들의 독립성을 매우 존중하는데 그 독립성은 고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회의란 누가 어떤 작품을 언제 다룰 것인가라는 매우 실무적인 논의까지 포함한다. 매체 속에서 필요한 이 협업을 소중히 여긴다. 이 대화의 과정에서 온갖 종류의 흥미롭고 유익한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뉴요커, 100년의 이야기>에서 비평의 윤리에 관한 통찰을 들려주었다. 창작자의 수년이 담긴 고투가 단 몇초의 냉소적인 언어로 파괴될 수 있는 시대에, 비평가가 정중한 목격자가 될 수 있다는 태도였다.

비평가의 자기 물음, 그리고 도덕적 책임감이 종종 타협이나 불성실함, 자기검열로 오해되곤 한다. 이는 구별해야 한다. 다만 영화에 대해 내 생각과 감정을 진솔하게 전하려 노력한다. 때로 표현이 공격적일 순 있지만 이 진솔함이 충동적인 무언가는 아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진솔함이란 자신의 감정적 반응에 대해서까지도 사유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이 필요 이상으로 파괴적인 방향을 지향해야 할 이유는 없다.

- 한편 저널리즘 비평이 자본의 논리와 마케팅 시장의 압박에 질식하기 쉬운 환경이다. 지난 몇년간 북미 저널리스트들의 토로가 잇따르기도 했다. 이 사이에서 당신은 어떻게 균형을 찾나.

이 질문에 나는 적임자가 아니다. <뉴요커>에서는 한번도 독립성과 정직한 표현을 위협받은 적이 없다.

- 2020년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진이 집단 사퇴했을 때, 당신은 이를 <뉴요커> 칼럼에서 다루면서 “<카이에 뒤 시네마>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시기는 영화산업과 가장 적대적이었을 때”라고 썼다. 사회·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뉴요커>와 달리 많은 영화 전문지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고전하고 <필름 코멘트>는 지면 발행을 중단했다. 한편 자발적 모임을 통한 소규모 출판이나 디지털 중심의 비평 활동들도 부상하고 있다. 전통적 종이 잡지의 상황과 그 바깥의 새로운 비평 생태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우선 영화 매체의 경제적 위기는 비평가가 전문적 기반 위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문적 기반 위에서 일한다는 건 단지 글을 써서 대가를 받는 정도가 아니라 편집자, 팩트 체커, 법률 자문 등과 함께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내 모든 글이 영화처럼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힌 크레딧 형태로 게재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를 중시한다. 전문 잡지가 존재하고, 그곳에 글을 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비평을 더 나은 직업적 제도 속에 두려는 노력이다. 한편, 비평을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처한 빈곤과 달리 지금 비평의 생태계 그 자체는 어느 때보다 나은 시절에 있다고 본다. 블로그, 소규모 매체, 온라인 매체, 심지어 레터박스 등을 통한 비평의 민주화가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영화적 관심사, 열정, 지식을 전면에 부상시켰다. 영화 만들기의 과정과 예술의 위치에 대한 보다 분별력 있는 감각도 함께하는 것 같고 영화 제작과 비평 사이의 거리도 예전보다 가까워졌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비평, 그리고 영화 프로그래밍 분야는 1980년대 이후 지금이 가장 흥미진진하다. 재능 있는 비평가들이 비평으로 생계를 꾸리기가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계속 나아간다는 사실 역시 분명해 보인다. 자기 작업을 이끌고 나아가 비평 전체를 이끄는 이들의 에너지야말로 지면의 운명과 별개로 비평의 지속과 향상을 말하는 증거다.

- 지금 미국에서 영화 비평을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현실은 어떻다고 보나.

하나의 매체에서 특정 직위를 갖고 있는 비평가의 수는 훨씬 줄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경제적 불안정성과 더불어 편집자를 비롯한 여러 스태프, 동료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스트레스다. 한편으로는 폴린 케일의 경력을 보면 거의 50살이 되어서야 <뉴요커>에서 첫 정규직을 얻었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비평(criticism)은 정의상 언제나 위기(crisis)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고 할까. 그러한 상황에서 계속해 나가려면 비범한 내적 힘과 추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비평가에게도 예술의 광기가 있다. 바로 그렇기에 젊은 비평가들이 오래된 안일함을 불식시키고 새로운 도덕적 범례를 제시하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 당신은 2009년부터 2017년까지 350편 이상의 짧은 영상 비평도 제작한 바 있다. 스스로 수행으로서의 비평이라 칭했었는데, 영상으로 비평을 전달하는 것이 글쓰기와 비교하여 갖는 별도의 의미가 있다면.

영상 작업은 거의 우연히 시작되었고 그 형식이 최적인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비평가가 자신의 목소리(사운드)를 더할 뿐 아니라 이미지에 개입하는 비디오 에세이를 더 선호한다. 즉 필름 메이커로서 만든 비디오 에세이 말이다. 이런 작업들은 주목할 만한 영화에 관심을 환기시키고 비평을 좀더 압축적으로, 동시에 매혹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모든 것이 비평이다. 라디오든 영상이든, 녹음이든 현장이든.

- <뉴요커>의 인스타그램과 틱톡을 통해 영화 큐레이션부터 연말 베스트 선정 쇼츠에도 등장 중이다. 한층 축약되고 대중화된 형식의 영상 콘텐츠에도 거리낌 없이 참여하는 이유가 있나. 이 또한 비평일까.

물론. 또 하나의 대화 형식일 뿐이다. 영화를 아끼는 사람들 역시 인스타그램과 틱톡 영상을 본다. 왜 배제하는가? 그곳에서도 영화 애호가들과 만날 수 있다. 다양성은 기쁨이자 자극이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것이 비평이다- 장문 리뷰, 단평, 에세이, 인터뷰, 라디오 대담, 팟캐스트, 쇼츠, 무대 위의 Q&A, 그리고 지금처럼 타국의 동료와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 여기서 내가 말하는 비평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저널리즘이다. 작가 중심의 매체인 <뉴요커>를 통해서 이 일을 하게 된 것이 엄청난 행운임을 자주 자각한다.

- 말로 전달하는 비평은 긴 호흡으로 쓰인 글과 같은 수준의 정밀함에 도달하기 어렵다. 스크롤의 속도와 사유의 깊이가 만드는 충돌을 어떻게 헤쳐 나가나.

본능적으로.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는 태도가 지금은 필요한 것 같다. 만약 그것을 우려하고 말로 전하는 비평의 방식을 벌도로 준비한다면 도리어 방해가 될 뿐이다.

리처드 브로디가 프론트 로 섹션에 쓴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진 사퇴에 관한 칼럼.

- 대학 시절 장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처음 보고 “나를 구성하는 모든 원자들이 재배열한 체험”을 했다고 고백한 적 있다. 30여년 이상 비평가로서 일해온 지금도 무심해지지 않고 그와 같은 충격을 느낄 때가 있나.

위대한 영화를 보며 물리적 충격의 감각에 압도되지 않는 비평가는 잘못된 직업을 택한 것이다! 물론 거의 개종에 가까운 체험, 영화를 통한 내 원자의 총체적 재배열은 드문 것이며 드물어야 마땅하다.

- 지난 5년 사이 비슷한 감각을 안겨준 영화가 있었다면 소개해달라. 그리고 당신이 겪은 날것의 충격과 글쓰기 사이의 틈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나.

충격에도 다양한 정도가 있겠지만 지난 5년간 내게 가장 강력했던 작품은 <니켈 보이즈>(라멜 로스 감독, 2024)다. 나는 글쓰기를 무언가 운동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숙련된 글쓴이가 되기 전에는, 영화에 대해 하나의 아이디어나 몇개의 문장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오랜 글쓰기 훈련, 그리고 편집자들과의 작업이 단상에 그치는 단거리 질주를 긴 호흡의 비평이나 에세이라는 장거리달리기로 확장해 나가도록 이끌었다. 뒤집어 말하면 어떤 아이디어- 대체로 문장 하나 혹은 둘- 를 역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 그 문장에 흘러들어왔으며 어떻게 관통하여 흐르는지를, 그 전개가 취할 수 있는 형태를, 그것을 향해 다가가고 도달하고 계속 나아갈 각도를 보는 문제다. 영화를 보았던 내 경험의 단순 번역이 아니라 사유와 문장의 운동적 활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영화의 충격을 흡수한 신체의 격렬함, 쾌락, 흥분을 고스란히 담는 방향으로.

- 2012년에 당신은 “영화는 죽지 않았고, 애초에 그런 적도 없다”는 강력한 제목을 가진 칼럼으로 주목받았다. 오늘날 우리는 스트리밍의 지배와 다양한 영상 플랫폼을 떠도는 콘텐츠의 범람 속에 살고 있는데 그 진단은 아직 유효한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양면이 제각기 너무도 분명해 보인다. 위대한 영화들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으며 놀랍고 전율적인 방식으로 예술을 전진시키고 있다. 그러나 독립영화 제작의 재정적 위기, 저예산영화를 극장이든 온라인이든 수익화하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은 절망적이다. ‘DIY 영화’가 매우 줄어들었고 관객에게 도달하는 영화는 더 적다는 것을 의미해서다. 충분한 자금으로 영화를 만들려면 영상 콘텐츠와 싸워 이겨야 하는 쓰라린 현실을 통과해야 한다. 각종 지원 제도나 투자 사업은 곧 영화를 전처럼 존중하지 않는 권력들과의 대면이다. 이런 물질적인 측면 외에도 과거와는 달라진 감독의 위상 등 여러 우려스러운 현실이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영화의 풍경이 과거보다 더 거칠고 메마른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

- 그렇다면 알고리즘의 획일화, 그리고 파편화 속에 노출된 독자들에게 기성 매체에 소속된 오래된 평론가의 역할과 존재감을 앞으로 어떻게 전망하나.

알다시피 하나의 대중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지 않나. 관객은 복수의 정체성과 관심사를 지닌 개인들일 뿐이다. 다만 매체란 정기 구독자, 그리고 여러 독자를 통해 대중의 일정한 범위를 규정하게 된다. 이는 독자보다 오히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유익한 전제다. 추상적인 차원이라 할지라도 일종의 대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 대화를 지속하다보면 하나의 희망을 품게 된다. 처음에는 이 대화에 속하지 않았던 이들도 조금씩 귀를 기울이고 참여하게 되리라는 희망. 영화비평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중심적 역할은 예언적인 것. 영화예술의 미래를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