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감독이 12·3 비상계엄을 소재로 다큐멘터리영화를 연출한다, 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 한국 사회가 정치적 격동기를 지나고 있던 1980년대 말에 등장했으나 당대의 지배 경향에 아랑곳하지 않는 독자 노선으로 ‘유치찬란한 멜로영화를 만드는 감독’, ‘역사의식을 망각한 악질 스타일리스트’로 매도당했던 그 이명세 아닌가. 40년 후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 이 장인 예술가의 세계관이 돌연 방향을 선회한 것인가. ‘이명세의 시네마틱 다큐멘터리’, ‘인터뷰, 내레이션이 하나도 안 나오는 놀라운 다큐멘터리영화’라는 마케팅의 수사보다 기록과 보존을 본령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이 이명세의 작가적 특질과 만나는 지점이 궁금해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란 12.3>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명세의 영화다. 눈과 바람, 낙엽, 신호등, 스모그, 그림자, 빛줄기, 골목길, 깜빡임, 철도 건널목 등 이명세의 전매특허로 알려진 표식들이 그득하기 때문이다. 시각예술의 역사를 순회하는 듯한 스타일의 상찬, 오디오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수사학, 프레임의 사방을 휘젓는 화면 요소들의 화성악, 영화에 관한 시각적 메타포 등 변하지 않는 영화의 에센스를 찾겠다는 근기와 집념에 사로잡힌 본질주의자의 영화이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독특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현대 다큐멘터리의 광활한 영역 확장에 비춰보더라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영화이다.
내란의 밤에 관한 초월의 영화
허깨비처럼 우리의 생각을 고착시키는 관습의 파괴자로서 이명세는 보통 사람의 평범한 삶에서 얻게 되는 범속한 깨달음에 매몰되기보다 범속함 안에서 비상함을 찾는 영화감독이다. <란 12.3>에서도 이런 기질은 완연하다. 물리적 대상을 재현하는 것에서 출발한 이명세의 추적은 여기서 비상계엄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를 흐르고, 연결하고, 장악한 힘의 실체를 좇는다. 카메라는 구체적인 사물, 사건, 인물을 재현하지만 이미지는 사물 너머의 관념을 지시한다. 장르와 언어, 형식, 스타일, 경계를 초월하려는 의지가 이미지와 이미지, 프레임과 프레임, 프레임 내부를 채운 시청각 세포들 사이에서 비등점까지 끓어오른다.
<란 12.3>은 영화에 관한 영화, 영화 보기에 관한 영화로 우리의 앞을 막아선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여 “저를 믿어주십시오”로 끝이 나는 전직 대통령 윤석열의 비상계엄 담화로 열리는 프롤로그는 수없이 되풀이된 동어반복의 풍경을 재생한다. 그러나 이명세의 접근은 판에 박힌 미디어 재현의 클리셰를 참신하게 전환하여 일거에 극적 긴장을 조성한다. 장엄한 음악을 신호탄으로 닫힌 커튼이 열리면 객석과 조명, 커튼 안의 또 다른 커튼으로 구성된 풍경으로부터 그곳이 극장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무언가 흥미진진한 영화가 상영되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스타카토로 고조되는 음악을 따라 카메라가 전진하면 커튼 안의 커튼이 열리고 흡사 영화를 위한 세트처럼 보이는 공간에 뚱한 표정의 윤석열이 나타나 비상계엄을 고지한다.
영화가 어떤 소재를 선택해야 하는지, 영화적 공간이 어떻게 소재를 다루어야 하는지, 시청각 언어를 통한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조형되어야 하는지에 정통한 이명세는 어처구니없는 그날 밤이 그대로 흘러가도록 두지 않는다. ‘국정 마비, 북한 공산 세력, 약탈, 파렴치한’ 운운하는 말이 쏟아질 때마다 숏의 리듬은 단속적으로 끊기고, 이미지는 이지러지며, 소리는 불협의 상태가 된다. 비현실적인 담화가 끝나자마자 쏟아지는 박수 소리 그리고 깔깔대는 웃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퇴장하는 윤석열의 어기적거리는 걸음, 프레임아웃하는 윤석열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수행원의 황망한 표정 위로 방향을 상실한 커튼은 우스꽝스럽게 펄럭이고, ‘대통령 윤석열’을 ‘대통령 김건희’로 잘못 쓸 뻔했던 해설 자막과 함께 한편의 무성 희극이 상연된다. 이 조롱과 야유의 오프닝은 <란 12.3>의 미학적 마니페스토로 기능한다. “이것은 정치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현실의 인물이 아니라 허구의 캐릭터처럼 보이는 윤석열과 그 하수인의 모습은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가 내란의 밤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를 호기롭게 선언하는데, 이명세는 이 영화를 수괴와 중요임무 종사자들을 캐스팅한 장르영화, 선과 악이 분명한 그래픽노블처럼 보이게 한다.
극장 의자를 고쳐 앉게 하는 인상적인 프롤로그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지금부터 마주할 이야기가 ‘영화’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장치이다. 가상의 관객들은 커튼 안의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게 된다. 영화는 “2024년 12월3일 밤 10시27분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윤석열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무성-다큐-픽션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순간을 기념(?)하는 박수와 웃음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드러나지 않는 관객들이 보여준 반응이다. 이중의 액자가 버티고 선 중층의 입구를 설정함으로써 <란 12.3>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구분을 무화하기 위한 구조적 프레이밍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란 12.3>은 액자 안의 액자 구조, 그러니까 영화 속 영화라는 틀을 제시한다. 영화의 안과 바깥, 내란의 밤을 증언하는 이곳과 저곳, 계엄의 시공간을 주파했던 기억들을 소환하기 위해 현실의 사태와 그에 대한 영화의 재현술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THE END, THIS IS NOT’이라는 맺음 자막으로 닫히는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열어두었던 커튼을 닫음으로써 이명세는 그만의 영화 상영에 종지부를 찍는다.
어지러울 란(亂), 亂의 미학
이명세는 영화의 제목 ‘란’(亂)이 ‘난중일기’에서 왔고,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내란 중에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하지만 감각적인 대상 너머의 거대함을 개념화하는 초월의 언어로서 ‘란’은 ‘어지러움’의 상태를 ‘어지러움’의 미학으로 제시한다. <란 12.3>의 어휘 목록에는 영상과 텍스트, 그래픽, 애니메이션, 게임, 일러스트레이션, AI, 페인팅, 팝아트가 섞여 있으며, 하나의 매체는 다른 것과 숨 가쁘게 자리를 바꾼다. 프레임 내 요소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형태와 질감을 전환하면서 어지러움(亂)의 감각을 강화한다. 시청각 이미지의 몽타주, 소리의 아우성, 텍스트의 폭격, 그래픽의 태세 전환은 난폭하게 시선을 교란하면서 역동적인 운동감각을 조형한다. 시각 요소들의 리듬과 템포는 자로 잰 듯 정확한 합에 의해 연출됐는데, 액션이나 카메라의 이동뿐 아니라 숏과 숏의 포개짐, 숏 사이의 전환은 조형적인 논리를 따르며 눈, 빛, 선, 운동의 질감, 양감, 컬러 등을 모두 활용한다. 다채로운 기원을 갖는 시각 기호들은 연상작용을 일으키면서 깊고 큰 주제를 강화하는 데 공헌한다. 요컨대 빛과 선, 점, 눈(雪)은 수미일관하게 연상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은 미장센의 세포일 뿐 아니라 시민혁명의 구성 성분이다. 빛과 점, 눈은 하나이다. 빛의 혁명을 지나는 동안 촛불은 응원 봉이 되고, 흩어진 점들은 선으로 연결됐다. 지하철노선(3호선 또는 5호선)을 표시하는 색깔들은 점이 되고, 이태원 참사, 세월호 참사의 상징이 되고, 눈이 되고, 전사(戰士)의 상징이 된다. 계엄의 밤에는 눈발이 날렸고, 키세스 전사들의 투쟁이 있던 날도 폭설이 내렸다. <란 12.3>은 빛과 선, 점, 눈들이 어우러져 이룬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이며, 서사의 여정도 그 지점에서 끝난다.
<란 12.3>의 시청각 전략의 핵심에는 지도와 음악이 있다. 내란이라는 사태를 맵핑하기 위해 이 영화는 GPS, 지하철노선도, 그래픽 지도, 건축 설계도 따위를 활용한다. 지도는 일종의 회로기판과 같은데, 내란의 기획자들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시민들이 기계 회로의 부품들처럼 각자 역할을 했던 그날의 지도를 통해 2024년 12월3일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치인과 관료, 군인, 그리고 시민들이 어떤 좌표에서 어떤 방향과 속도로 움직였는지를 보게 된다. 물론 우리는 디데이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알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안내받을 필요가 없지만, 다시 강조하건대 이것은 정치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관객들이 비상계엄 서사를 이미 알고 있고, 익숙하다는 전제는 장르와 스타일의 실험을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혁명-에너지의 방향과 속도, 크기를 기호화한 회로로서 ‘지도’는 따라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 세계의 에너지가 모이고, 쌓이고, 폭발하는 과정을 기술하는 내러티브 장치로 기능한다.
12월3일의 평범했지만, 기이했던 일들을 묘사하는 한 몽타주 시퀀스를 보자. 급격히 추워진 날씨를 고지하는 일기예보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깔고 삭풍이 세상을 덮치고, ‘열차접근’이라는 전광판 메시지와 함께 <징글벨>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흰색의 빛을 뿜어내는 육중한 열차의 움직임이 붉은 신호등과 포개지면서 알알이 빛나는 빛의 입자는 흰색과 붉은색이 빽빽한 한낮의 도로로 시간을 전환시킨다. 유튜브 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감사원장의 탄핵소추안 발의, 정보사령부에서 내란범들의 대화, 서울지방법원으로의 이재명 출두, 707특수임무단에서의 비밀 대화, 비행하는 ‘서울시’의 기구(氣球),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한강 다리를 달리는 열차, 김장 나눔 행사에 참석한 국회의장, 질주하는 열차,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롯데리아 회동이 있었던) ‘상록수역’을 향하는 열차의 선들, 롯데리아의 문으로 이어지는 선의 움직임으로 연쇄 행렬을 이루고 이미지의 텍스처는 실사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전환한다. 어느새 <징글벨>은 스파이 액션영화에 어울릴 법한 스릴러풍 음악으로 표정을 바꾸었고, 스크린에서는 희대의 남루한 스파이 액션 코미디가 상연된다.
극장의 객석에는 관객들이 앉아 있고 커튼 안에서는 수많은 장르를 섞은 하이브리드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중이다. 블랙코미디풍의 비상계엄 담화를 필두로 도시 누아르를 떠올리게 하는 이재명의 탈주극, 무성의 그림자놀이로 재현되는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네개의 테이크로 제시되는 김건희 연출의 실패한 작전 영화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스타일의 종합 선물 세트를 경험하게 된다. 이 장르의 백과사전 안에는 비상계엄이라는 사태가 불러일으킨 다채로운 반응, 공포와 불안, 우스꽝스러움, 스릴, 조바심, 안도가 녹아 있다.
빛과 소리로 연주하는 시청각 오페라
<란 12.3>에서 이명세가 추적하는 것은 ‘에너지’, 그러니까 내란의 진압을 가능하게 한 거대한 힘의 메커닉이다. 비록 <란 12.3>이 계엄 전후의 정치적 정황들을 연대기적으로 따라가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 영화는 서사의 선형적 전개나 극적 동기에 의해 추동되는 삽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명세가 설계한 구조의 초점은 계엄의 시간을 관통하는 초월적인 힘, 정신의 에센스이다. 정치적 위기를 극복한 공동체의 힘은 어디서 기원했는가? 빛과 소리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했나? 90여분간 이어지는 기록과 구성, 재연, 다시쓰기의 여정에서 이 숭고한 에너지는 오디오 비주얼 이미지의 운동, 점과 점, 선과 선, 빛과 빛이 만나고, 겹치고, 합일하는 형상으로 형상화된다. 눈에 보이는 형상을 빌려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쫓기 위해 이명세는 점과 선들의 접속, 색채들이 합을 이루는 군무, 그림자의 율동, 빛의 깜빡임이 연대의 형상으로 화(化)하는 과정을 구상과 추상, 실사와 그림,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가 사라진 통합의 미학 안으로 도입한다.
이 글의 초입에 던졌던, 다큐멘터리 형식이 이명세의 작가적 특질과 어떻게 만났는가, 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시간이다. <란 12.3>은 빛과 소리, 이미지와 사운드 두개의 선로 위를 달리는 열차이다. 이미지 트랙과 사운드 트랙을 질주하는 열차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관객들 앞에 상연된 것은 흥미진진한 장르영화가 아니라 프레임 안 일체의 요소들에 생명을 불어넣은 시청각 언어의 오페라이다. 이 담대한 여정에 있어 음악감독 조성우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미지와 소리가 만난 시청각 오페라의 또 다른 지휘자라 할 수 있다. 조성우의 음악은 주요한 순간들에 방점을 찍고, 논평하면서 “서사의 진행을 조력하기 위해 음악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해묵은 통념을 뒤집는다. 독자적인 스토리 서술 장치로서 음악은 그 자신의 논리에 따라 길이와 강약, 볼륨을 조정하며 시각 요소들과 경쟁한다. 배경과 무드를 제공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 사운드의 존재감은 장막을 뚫고 (실제로 조성우가 출연해 피아노를 연주한다) 돌출된다.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명세는 <란 12.3>에서 세상의 불이(不二)함에 대한 인식론에 기초해 온갖 나눔과 차이를 꿰뚫고, 사물과 예술의 본질이 하나임을 증명하려 한다. 이 영화의 주요 장면들은 시민들로부터 얻은 발췌 영상에서 온 것이지만 그들은 열차의 질주와 국회 보좌관의 달리기, 광채를 내뿜는 점들, 좌우 방향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얹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 엄선된 이미지 몇개만으로 <란 12.3>은 대한민국을 뒤흔든 정치 사태에 관한 기록을 관능적인 시청각 오페라로 탈바꿈시켰다. 이것이 사실의 권능을 주창하는 다큐멘터리에 투신하여 이명세의 시네마가 보여준 성취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