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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비상계엄을 말할 때 절대 빠지면 안되는 장면이 무엇이지?” - 영화 <란 12.3> 제작기

이명세 감독, 조성우 음악감독, 이강훈 일러스트레이터가 말하는 <란 12.3>

이강훈, 이명세, 조성우(왼쪽부터).

<란 12.3>은 여느 다큐멘터리보다 빼곡한 엔딩크레딧을 자랑한다. 12·3 비상계엄 전후 대한민국을 염려한 각계각층이 이름을 보탠 결과다. 이명세 감독이 제작 소식을 알리자 283명의 시민과 65개 의원실에서 2024년 12월3일을 포착한 사진, 영상, 자료를 보내왔다. 약 1만5천명이 영화 완성을 위한 후원에 참여해 크라우드펀딩 목표 금액 110%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개봉하는 <란 12.3>은 여러 모양을 한 파편들이 한데 섞인, 다만 이명세 감독의 스타일로 다듬어진 콜라주다. 조각들을 연결한 접착제로서의 선율은 조성우 음악감독이 만졌다. 또 하나의 조각으로서 사태를 집약한 일러스트는 이강훈 작가의 작품이다. 그는 <씨네21> <한겨레21>에 삽화를 그리며 활동을 시작해 <한국 괴물 백과><독립운동가, 난민이 되다>등의 도서에도 그림을 남겼다.

그들은 어떻게 모였을까. 우선 이명세 감독에게 조성우 음악감독은 “당연히 옆에 있는 내 팀”이다. 그들은 <형사 Duelist>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함께했다. 거기에 <란 12.3>이 더해지는 것이 조성우 음악감독에게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이명세 감독이 신작을 만든다는 사실에 반가워한 다음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명세와 다큐멘터리의 관계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자신에게 익숙한 다큐멘터리와 이명세 감독이 구상하는 다큐멘터리는 분명 다를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명세 감독은 다큐멘터리에 이렇게 접근하는구나 싶어 놀라운 순간들이 따라왔다. 그중 조성우 음악감독의 주의를 환기한 건 비상계엄이라는 스토리 그 자체다.

이명세 감독님은 이야기를 촘촘하게 풀어가는 편이 아니다. 확고한 서사보다 감각에 집중한 연출을 하지 않나. 혹자들은 이명세 감독 영화에 줄거리가 없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란 12.3>에는 확실한 줄거리가 있다. 그걸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를 가져오는 방법론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번만큼은 감독님이 과거와 같은 공격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허진호 감독도 그러더라. 이 영화가 오히려 대중과 이명세가 만나는 좋은 찬스가 될 것 같다고.”

한편 <란 12.3>을 통해 처음으로 이명세 감독과 협업한 이강훈 작가에게는 “다큐멘터리에 관한 약간의 편견”이 있었다. “감독의 시선이나 주장이 강하게 반영돼 관객으로서 불편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해온 것이다. 하지만 <개그맨>을 본 순간 이명세 감독의 세계에 빠져든 팬으로서 그의 연락에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려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란 12.3>이 개인 의견이 아닌 팩트를 충실히 따라가려는 다큐멘터리라는 걸 확인하고나서부터는 흥미로웠다. 며칠 전 시사에서 관객으로서도 그랬다. 결말을 알아도 손에 땀이 나는, 그 자체로 엔터테이닝한 영화였다.”

결말을 알아도, 그날을 체험하라

이강훈 작가가 그린 일러스트.

이명세 감독이 시사회 당일 못내 아쉬웠던 건 사운드였다. 극 초반 들려오는 헬기 소리가 더 공포스럽기를 바랐다. “귀를 찢을 것처럼 크게 들려도 좋을 것이라 봤다. 그 현장에 없었던 분들도 실감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마지막까지 후반작업을 위해 애쓴 그는 극장 바깥에서 이 영화를 접할 관객까지 떠올렸다. OTT 등을 통해 작은 화면으로 <란 12.3>을 감상할 이들이라면 헤드셋을 써줬으면 한단다. “그렇게 한다면 이머시브 무비를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체험’이라는 키워드는 이명세 감독에게 중요했다. 그날을 기억하는 시민들의 사연을 아카이빙한 것도, 국회 안팎의 인물들에게 각자의 동선을 물은 것도, 특히 당시 국회로 이동하는 모습을 생중계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라이브 스트리밍을 따온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한 데이터를 공감각적으로 재구성하고 싶었다. 이강훈 작가도 동의했다. 지면을 채우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온 그는 영상을 염두에 둔 작업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당혹감, 공포감, 황당함이 깃든 표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남녀노소가 모인 그림을 그렸다. 윤석열이라는 캐릭터를 우스꽝스럽게도 드러내고 싶었다. 그로 인한 복합적인 감정이 내가 그린 사람들의 얼굴에 보이길 바랐다.”

음악이야말로 그 복합성을 성실히 견인한다. 계절감이 배어 있던 캐럴이 멜로디를 바꿔 고조되는 과정을, 조성우 음악감독은 “웅장한 대서사시”처럼 승화하고 싶었다고 한다. 음악과 영상이 가까워야 한다는 규율은 잠시 잊으려 했다. “사실을 재연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게 아닌 감각을 창조하는 다큐멘터리”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 모티브를 건지기 위해 맨땅에서 헤매던 때, 조성우 음악감독은 이명세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감독님이 찰리 채플린 영화를 다시 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몇편을 틀어놓고 쭉 보는데, 무성영화 대화 신에 묻어 있는 해학과 익살이 이런 것이구나 싶더라! 거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조성우 음악감독이 채플린을 언급하자 이명세 감독이 화답했다.

“우리 영화에는 슬랩스틱코미디 같은 신들도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옥상 신처럼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 셈이다. 한밤중 군인들이 시민들을 응시하는 장면도 실은 호러에 가깝다. 야간에 찍어서 화질도 흐릿하다. 마치 오래전 문화학교 서울에서 보던 몽롱한 예술영화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들을 움직인 이들이 벌인 행태는 블랙코미디스럽다. 그 격차마저 영화적이라 더더욱 광주극장에서 막이 열리는 장면으로 <란 12.3>이 시작하길 바랐다. 관객이 무대 위에 등장한 광대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오프닝을 목격하도록.”

지하철노선도, 도트 게임,그리고 AI까지

사진제공 프로덕션 에므

이명세 감독은 그 뒤를 잇고자 자문했다. “비상계엄을 말할 때 절대 빠지면 안되는 장면이 무엇이지?” 그건 빛의 전사들이었다. 그래서 에세이 앤솔러지 <다시 만날 세계에서: 내 란 사태에 맞서고 사유하는 광장의 여성들>에 유선혜 시인이 실은 산문을 인용하는 것은 물론 각종 댓글과 SNS 속 반응들도 시각화했다. 그중 <란 12.3>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이미지는 지하철노선도다. 그것은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자 시민들이 “국회로 모이자”고 단결하는 시점을 축약한 장면이다.

“지하철노선도가 하나의 색깔로 이뤄져 있었다면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하철노선도에는 여러 색과 빛이 ‘뿅뿅뿅’ 하고 이어져 있다. 그게 광장에 모인 응원 봉과도 연결된다. 또한 지하철은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발견에 더해 기차라는 소재를 향한 나의 집착이 만나 지하철노선도 시퀀스가 탄생했다. 그게 상록수역이라는 상징적인 장소로까지 가닿은 것이다.”

지하철의 은유가 섬세히 퍼지는 와중에 아날로그 도트 게임을 활용한 장면과 AI가 생성한 이미지들은 내란 수괴와 그 가담자들의 폐부를 겨냥한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심각하게 그들을 풍자한 이명세 감독에게는 처음부터 원칙이 있었다. “계엄에 가담한 세력들을 형상화할 때만 AI를 쓰자.” 그 피날레에 치달아 AI와 어우러지는 ‘피아노맨’은 조성우 음악감독이다. 조성우 음악감독의 연주에 맞춰 내란 이후의 정국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그 시퀀스를 위한 곡을 쓸 때, 조성우 음악감독은 악보에 적어뒀다고 한다. “휴머니티란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결국 이 영화는 묻는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됐지? 우리에게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있지 않나? 그 순수함, 그 아름다움을 잡아내는 선율을 찾기까지 두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그 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관객에게 이 곡이 위로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 장면은 원래 <란 12.3>의 엔딩을 차지할 예정이었다. 이명세 감독 왈, “그 뒤로도 수많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다른 결말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조성우 음악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가 12월3일 국회를 지킨 시민들, 보좌관들, 의원들과 그 이후를 책임진 빛의 전사들에게 수고하셨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다는 진심만큼은 여전하다. 감독으로서는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도 서스펜스를 만들었다는 데 만족한다. 관객들도 <란 12.3>으로 그날을 다시, 제대로 실감하셨다면 내 작업이 성공한 것일 테다.”

유영길 촬영감독을기억하며

사진제공 프로덕션 에므

이명세 감독은 <란 12.3>말미에 유영길 촬영감독을 기억한다는 문구를 새겨넣었다. 이명세 감독에게 유영길 촬영감독은 <개그맨><나의 사랑 나의 신부><첫사랑><남자는 괴로워>를 함께한 동료이기 전에 5·18 민주화운동 현장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영상기자로서 각인되어 있어서다. 이명세 감독은 유영길 촬영감독과 오랜 시간 동고동락하면서도 그가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에게 어떤 후유증이 남아 있다는 건 눈치챘지만, 누군가가 물으면 그는 언제나 답을 피하곤 했다. 주위에 피해가 갈지도 모르니 참아왔던 게 아닐까.”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년이 흘러 진실이 밝혀졌다. 2021년 유영길 촬영감독이 제1회 힌츠페터국제보도상 수상자로 선정되고, 이명세 감독은 다짐했다. “새 영화를 만든다면 어떻게든 그의 이름을 적어야겠다. <란 12.3>에도 그가 찍은 광주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