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영화를 보고 아이디어를 내고 일정을 잡는다. 이번주에는 무엇을 소개할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전할지 궁리하다 보니 어느새 한주가 지났다. 주간지의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생각해보면 <씨네21>이 주간지로 출발한 이유는 단순하다. 영화가 매주 개봉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화가 도착하면 그 소식을 전하고 관객과 만날 자리를 마련한다. 물론 영화잡지의 일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를 이렇게 보면 어떨까, 이런 구석에도 눈길을 주면 어떨까, 미처 몰랐던 재미를 발견하고 익숙한 영화를 조금 다르게 만나는 방법을 제안하는 발견으로 이어져야 한다. 영화를 소개한다는 건 결국 영화와 관객 사이에 하나의 길, 새로운 길을 내는 일이다.
요즘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시장이 성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로 퉁치기엔 외곽에 자리 잡은 작품들도 있다. 한 장면을 붙들고 몇 개월을 씨름하고 굳이 어렵고 번거로운 방식을 고집하여 어떤 경지에 다다랐지만 동시에 끝내 다소 낯설고 어려워진 작품들. 물론 모든 영화가 많은 관객을 만날 수는 없다. 애초에 대중적인 호응보다 작가 자신의 질문을 해결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 작품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관객을 원하지 않는 영화는 없다. 그저 무엇을 먼저 선택하고 무엇을 끝내 포기하지 않을 것인지, 가치의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작고 단단한 영화일수록 그 선택의 흔적이 선명하다.
이번주 소개하는 세편의 애니메이션, 일본의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 프랑스의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한국의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가 딱 그렇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가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밀어붙여 응축한 결과물이다. 애니메이션의 저변이 넓어졌다는 기분 좋은 착각 덕분에 이런 영화들이 국내 관객과 만날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선 반갑다. 세편 모두 만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그 결기와 고집의 표면 아래에서 나는 도리어 기대와 희망을 읽는다. 한명이라도 이 세계에 문 두드리고 들어와주기를, 작가가 발견한 무언가를 함께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보인다. <씨네21>은 그저 ‘이런 영화도 있다’고 알리는데 그치고 싶지 않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때 발견할 수 있는 의외의 즐거움을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공유하고 싶다.
나는 영화잡지의 일이 기본적으로 온기에 기반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대해 쓴다는 건 결국 만든 이의 수고와 시간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연민과 너그러움으로 장점과 미덕을 먼저 찾아주는 일. 웬만한 영화에서는 나름의 재미를 발견하는, 이른바 즐거움의 저점이 낮은 내겐 썩 잘 어울리는 옷이다. 다만 이런 태도는 평론가로서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영화가 좋다고 말하는 건 아무 영화도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애정은 차이에 기반하는 법이고, 분명한 기준으로 그 차이를 밝힐 때 비로소 신뢰가 쌓인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려면 아쉬운 것을 아쉽다고 말할 용기도 필요하다.
이상적으로는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를 추구한다. 하지만 실제론 좋아하는 노래 가사처럼 ‘마음은 말처럼 쉽지 않아’ 자주 흔들리며 갈지자걸음을 걷는다. 한마디로 자주 망한다. 어쩌면 균형 잡힌 시선이란 건 영원히 불가능한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영화 글쓰기는 용기와 온기 사이의 일이란 믿음을 놓지 않으려 한다. 따뜻하게 바라보되 차갑게 판단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되 끝내 애정을 잃지 않는 일. 이번주도 그 사이를 갈지자로 걷는 중이다. 당연히 곧게 뻗은 지름길은 아닐 것이다. 느리고 구불구불하고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런 식으로 길이 조금씩 넓어지면 더 많은 사람이 함께 걸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고 소중한 작품들의 문을 두드리다 보니, 어쩌나. 점점 더좋아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