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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3 - 하나되면 죽는 사람들
2002-07-18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해미님. 월드컵이 끝나고 히딩크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여진은 남습니다. 고단한 사람들이 모처럼 맞은 축제의 달콤한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히딩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에서 “4700만 우리 모두 가슴 벅차게 행복했습니다”로 이어지는 삼성카드의 심령부흥회풍 광고(이 기괴한 광고에 왜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 걸까요)나, 월드컵에 돈을 댄 KT와 거저먹은 SK의 싸움질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장사꾼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팔아먹는 것이고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애국심’은 ‘대한민국의 구매력’일 뿐입니다.

인텔리들의 호들갑 역시 여전합니다. 몇달 전 ‘노풍’을 87년 민주화운동과 연결시켜 ‘혁명’이라 부르던 그들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혁명을 갖다 붙입니다. 소싯적에 잠시 혁명에 몰두했으되 이젠 누구보다 혁명을 회의하는 그들이 혁명이라는 말을 그리 즐겨 쓰는 건 희한해 보이지만, 2년 전 낙천낙선운동에 슬그머니 혁명을 갖다 붙인(과연 그 혁명은 무엇을 바꾸었던가요) 다음부터 그들은 무엇에든 기회가 되는 대로 혁명을 갖다 붙입니다. 10여년 전 별다른 자기 설명없이 제 혁명에 침을 뱉은 그들로선 혁명을 일반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인텔리들이 그렇게 혁명을 갖다 붙이는 좀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그걸 진짜 혁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속이 아니라 세상의 외곽, 술집이나 세미나실에서 세상에 대한 관찰기를 교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창백한 눈에 650만이 넘는 붉은 인파가 거리를 메우고 함성을 지르는 광경은 그저 ‘혁명’인 것입니다. 해미님. 우습지 않습니까. 꿈도 희망도 없는 고단한 일상에 찌들 대로 찌든 사람들이 제 나라 축구팀이 세계 16강 진출이라는 목표치를 두번이나 경신했다면 너도나도 광장으로 뛰쳐나오는 일이야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거기에 무슨 의식성이 있고 혁명이 있다는 겁니까.

인텔리들은 늘 뒤늦게 흥분하고 먼저 절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대중의 저력’에 뒤늦게 흥분하고 ‘대중의 반동’에 먼저 절망하는 발작과 패닉의 끝없는 반복상태를 보입니다. 대중이 그저 묵묵히 흐르는 강물이라면 그들은 그 강물의 굽이굽이 변화무쌍한 속도에 시시각각 깡총거리는 송사리들입니다. 노풍은 조금만 진중한 사람이라면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민주당 경선이야 민주당 안에서 하는 건데 한나라당도 아니고 민주당이라면 한국 평균은 되는 사람들일 터, 그런 사람들이 몇년 전 앞머리 이상하게 치켜세우고 박정희 흉내나 내던 사람을 대통령 후보로 뽑는단 말입니까.

월드컵과 관련한 인텔리들의 호들갑을 그저 볼썽사나운 꼴로만 넘길 수 없는 건, 그들이 연신 ‘국민 통합’이니 ‘국운 융성’이니 ‘민족적 환희’니 하는 국가주의적 선동을 해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매우 급진적이라 알려진 한 문화과학자는 “국민적 열정을 국민적 캠페인으로”라는 언사를 스스럼없이 사용합니다. 해미님. 진보주의의 출발은 세상을 계급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물론 국가가 있고 국경이 있는 한 국가나 민족의 구분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한국 국적을 가졌거나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다 내 나라 내 동포는 아닙니다. 일생을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오신 해미님 아버님은 과연 이건희씨와 동포입니까, 켄 로치의 <빵과 장미>에 나오는 3등 미국인들과 동포입니까.

세상엔 응당 하나 되어야 할 것과 갈라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사회는 자본과 노동자가 적대적 긴장을 이루는 사회이고 우리는 그 분명한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건 도덕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실재하는 현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직하게 땀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끼리의 ‘연대’이지 적대하는 계급끼리의 ‘통합’이 아닙니다. 한국의 자본과 노동자가 ‘애국’의 이름으로 하나될 때 노동자에게 돌아올 건 죽음뿐입니다. 해미님. 오늘은 ‘계급’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해드리려 했는데 그렇지 못했군요. 건강하십시오. 2002년 7월11일. 김규항 드림.김규항/ 출판인 gyuhang@m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