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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나들이는, 무죄!
2001-03-28

현실과 도피의 교차로 빚은 일탈의 드라마 <너스 베티>

▣ 상냥한 베티는 앞치마 벗을 틈이 없는 웨이트리스 겸 주부다.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기는커녕 동료들이 선사한 꼬마 케이크를 지저분한 입을 쩍 벌려 베어먹어버리는 고릴라 같은 사내랑 산다. 눈 씻고 봐도 사랑할 까닭이 없는 남편 덕분인지 베티는 메디컬 멜로드라마 <사랑하는 이유>에 푹 빠진 지 오래다. 자동차 딜러인 남편은 마약 거래의 뒷처리를 칠칠치 못하게 한 탓에 어느 날 밤 부자(父子) 해결사 손에 죽고, 곁방에서 연속극 녹화 테이프를 보다 남편의 피살 광경을 목격한 베티는 순간 머릿속에서 현실을 내쫓고 드라마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과거의 약혼자라고 믿는 드라마 주인공 라벨 박사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눈을 반짝이며 “저예요!”를 외치는 베티를 만난 연속극 스타는 그녀를 걸출한 메소드 연기자라고 여기고, 베티를 쫓던 킬러 찰리는 점점 베티의 사진과 일기에 빠져들면서 그녀를 구원의 마돈나로 믿게 된다.

소프 오페라, 장르의 교차점에 서다

<너스 베티>는 대단한 균형감각의 영화다. 만약 어딘가에 영화들끼리 모여 사는 나라가 있어 접시돌리기 경연대회라도 열린다면 너끈히 일등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하다. 우선 <너스 베티>의 각본은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밧줄을 팽팽히 맨다. 그리고 그 위를 걸으며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채찍을 씽씽 휘두른다. 현실과 판타지의 충돌 안에서는 다시 베티의 판타지와 킬러 찰리의 판타지가 돌림노래처럼 어깨를 스친다. 로드 무비의 얼개를 한 <너스 베티>는 엽기적 폭력, 스크루볼 코미디, 여성영화, 미디어 풍자 등등 여러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면서 각각의 과목에서 고득점을 올린다. 심지어 돌멩이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는 쾌거도 있다. 베티가 닥터 라벨 역의 스타 조지를 만나 털어놓는 간절한 진심을, 조지는 시종일관 아마추어의 명연기로 이해하고 응대한다. 관객은 그렉 키니어와 르네 젤뤼거가 주고받는 세련된 코미디의 리듬이 고조될수록 그에 비례해 차오르는 연민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당황하게 된다. 온화하게 흘러가다 음산한 단조의 음정들이 하나둘 섞여드는 테마음악의 선율이 상징하듯, <너스 베티>는 사람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피칠갑을 해놓고 바로 다음 순간 동화라도 되는 양 베티로 하여금 종이인형을 들고 마법사를 찾아가는 노란 벽돌길에 오르게 하는 뻔뻔함을 발휘한다.

<너스 베티>의 곳곳에 십자표를 긋는 온갖 충돌의 교차점에 버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흔해빠진 소프 오페라, 즉 TV 연속극이다. 그리고 이 열쇠는 <너스 베티>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 가운데 여성영화로,그리고 미디어 문화에 대한 촌평으로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영화의 초반이 다 지나도록, 한없이 착하고 남들이 말하듯 “아주 많은 일을 참아내는” 성격인 베티는 단 한번도 불행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연속극에 대한 그녀의 열광과 그것을 ‘호모들의 잔치’로 사납게 일축하는 남편의 대사 하나만으로 베티의 처량한 현실을 짐작할 수 있다. 첫눈에도 남편 델은 무식하고 무례하며 베티에게 불성실하다. 하지만 <너스 베티>의 심성 여린 베티는 <베티 블루>의 다혈질 베티처럼 눈에 포크를 찌르는 대신 소프 오페라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온순하게 웅크린다.그 세계에서 남자들은 무심하지도 잔인하지도 않다. 그 세계에서 여자들은 무작정 타인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역할을 강요받는 대신 스스로 사랑받고 보살핌을 받으며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가치를 확인한다. 베티의 드라마 탐닉은, 1980년대에 본격화된 소프 오페라에 관한 여성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곁들여질 만한 삽화다. <사랑하는 이유>를 보는 시간만큼은 베티는 아내로서의 역할을 순간적으로 면제받고 프라이버시에 빗장을 지른다. 한밤에 손님을 데리고 들어온 남편의 눈을 피해 소리 죽여 연속극 녹화 테이프를 보던 베티는 남편이 산 채로 머릿가죽이 벗겨지는 제법 요란한 상황이 거실에서 벌어지는 것을 문틈으로 보고도- 넋이 나간 상태이긴 해도- 비디오의 리와인드 단추를 고집스럽게 누른다. 소프 오페라 속에서 되풀이되는 연애담은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베티는 그것으로부터 일상을 버틸 수 있는 위안과 부축을 얻고, 어딘가에 존재할 행복의 이미지를 드라마 시청을 통해 매일매일 자신에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또한 <너스 베티>에서 소프 오페라는 베티와 다른 여자들을 보이지 않는 공동체로 묶어준다.줄줄이 낳은 아이를 키우느라 늘 지쳐 있는 옆집의 친구, 애리조나주에서 만난 바의 여주인,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베티가 마주치는 흑인 수간호사와 히스패닉계 변호사는 모두 <사랑하는 이유>로 이럭저럭 사인이 통한다.

도피란, 반드시 비난받을 일일까?

캔자스주 경계를 한번도 밟아본 일이 없던 베티가 브라운관 속에서 그녀를 손짓하는 다정한 피앙세를 찾아 떠난 육체적, 정신적 여행은 일종의 ‘도피’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도피라는 단어에는 언제나 ‘도피주의’라는 파생어가 추레한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하지만 ‘도피’의 혐의는 한 영화에게 반드시 비평적인 저주일까?

할 수 있는 일과 의식에 멍에가 씌워져 있는 일상의 공간을 훌쩍 박차고 떠나는 ‘도피’의 힘은, 우리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주로 ‘강원도의 힘’으로, 서구영화에서는 햇살 청명한 지중해 나라들의 힘으로 묘사돼 왔다.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길 중간쯤에서 베티가 들른 바에는 꽤나 신산스런 인생을 살아온 듯한 중년의 여주인이 있다. 베티의 사연을 들은 그녀는 <로마의 휴일>을 보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던 일을 황홀하게 추억한다. 로마에서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되뇐다. “그때 난 카페 시스티나에서 매일 카푸치노를 마셨어. 로마를 가슴에 담았어. 아무도 그걸 내게서 빼앗지 못해. 그건 내 평생 최고의 일이었어. 왜냐면 내가 직접 해낸 일이니까.” 베티의 기이한 모험을 여성들의 보편적 경험으로 확장하는 이 중년 여인의 회상은 <셜리 발렌타인> <브레즈네프에게 보내는 편지> <해변의 바지> 등 80년대, 90년대 영미권 여성영화 속에서 이탈리아로 그리스로 러시아로 떠나갔던 많은 여자들을 상기시킨다. 투쟁하는 대신 공항으로 역으로 달리는 그녀들의 여행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도피’였으나, 이 영화들은 과감한 공간적 탈출을 통해, 가부장제의 규율을 위반한 여성들을 종국에는 제자리로 돌려놓고 말았던 고전 여성 영화 내러티브의 가드레일을 비틀어 놓는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대부분의 평범한 여성 관객처럼 마음 약하고 성실한 아내이자 어머니였던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주류사회를 때려부수는 거사를 도모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상태를 ‘통째로’ 버리고 문턱을 넘음으로써 최소한의 카타르시스를 얻고 ‘나쁜 여자’가 된 죄값도 문책받지 않았던 것이다. 베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도 받는다. 환상 속으로 완벽하게 도피한 베티가 거짓말처럼 드라마 스타와 데이트를 하자 놀란 룸메이트가 묻는다. “넌 언제나 그렇게 원하는 걸 얻니?” “아니 대부분은 절대로 얻은 적이 없어.” 베티가 최초로 욕망하는 바를 얻은 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철저하게- 자아까지 포함해서- 내동댕이치고 현실의 스위치를 딸깍 내려버리고 비록 환각일지언정 새로운 정체성 속으로 도피했을 때였다. 도피라는 단어의 뿌리에 ‘뒤에 남겨진 상태’라는 뜻과 나란히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프로젝션의 의미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캐내는 것은 구차한 사족이 될까?

중제: 판타지가 해악일지라도

‘도피’의 모티브를 영리하게 구사한 <너스 베티>의 처방은 판타지, 특히 대중 매체가 생산해내는 환상에 대한 감독의 접근방식과도 통한다. 닐 라뷰트 감독은 소프 오페라 속 판타지의 세계가 해악 투성이라고 지사처럼 부르짖기보다는, 스스로 그 물에 발을 담그고 옷자락을 적셔가며 씨름하는 전략을 택한다. <너스 베티>는 소프 오페라를 조롱하는 동시에,과장과 폭발,가파른 반전에 의존하고 권선징악으로 귀결되는 전형적인 연속극의 구조와 시트콤풍 대사를 능란하게 활용함으로써 소프 오페라의 언어를 도둑질한다. 베티가 조지와 데이트하는 순간 게리 마셜의 <귀여운 여인>이나 존 애브넛의 <업 클로스 앤 퍼스널>과 같은 마차에 올라탄 ‘신데렐라 스토리’가 되는가 잠시 불안을 자아내던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미련없이 뒤돌아선다. <너스 베티>는 소프 오페라가 대변하는 대중문화의 판타지가 개인의 통증을 간호할 수 있는 치유력을 가졌다는 현실을 필요악으로서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소비가 현실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불만과 결핍의 징후로 나타난다는 점을 똑똑히 전한다. 게다가 <너스 베티>에서 판타지는 베티에게 구원을 덥석 안겨주지 않는다. 베티가 도망쳐 들어간 세계 역시 결점투성이이며, 꿈속의 왕자 닥터 라벨도 실은 어리석고 경박한 남자다. 다만 <너스 베티>에서 소프 오페라의 판타지는 베티를 문 밖으로 끌어내고 급기야 현실을 바꿀 수 있도록 시동을 걸어준다. 그리고 닐 라뷰트 감독은 <너스 베티>에서 판타지의 소파 안에 몸을 완전히 파묻는 대신,소프 오페라의 세트 뒤 풍경과 두 킬러가 저지르는 난장판으로 이어지는 클라이맥스를 빌어 환상과 도피가 낳은 찌꺼기와 현실적 결과를 주섬주섬 늘어놓는다. 마치 “상상은 자유야, 하지만 여기를 떠날 순 없어. 책임 질 건 져야지.”라고 말하듯.

중제 : 돌아온 베티, 내일은 다르리

문턱을 넘어 대기 속으로 발을 내딛고 세상을 바라보는 채널을 바꾼 것은 베티뿐이 아니다. 언어 장애자 여성을 두 남자가 사악하게 골탕먹이는 내용의 <인 더 컴패니 오브 맨>, 서로를 할퀴는 여피들의 복잡한 섹스 밴다이어그램을 그린 <나스타샤 킨스키의 스와핑>을 통해, 파충류의 눈을 가진 관찰자라는 평을 얻었던 라뷰트는 <너스 베티>에서 실내극 무대 같았던 전작들의 번지 없는 공간을 벗어나 캔자스에서 그랜드 캐니언을 거쳐 LA까지 영화를 몰고 다닌다. 전갈의 독기를 뿜던 냉소적인 대사를 치고 받는 몸의 폭력으로 대신했고, 실험실의 감시 카메라처럼 얼어붙었던 카메라에도 움직임을 불어넣었다. 무엇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아예 찢겨나간 사전의 임자 같던 그가 <너스 베티>의 결말에서는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카페에 베티를 데려다놓고 은근 슬쩍 미소를 흘린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한줌의 난센스도 포함하지 않는 보송보송한 물건이다. 아주 조금 더 관대하고 현실적으로 변화함으로써, 미학적으로 상업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영화를 만들어낸 <너스 베티>의 주도면밀함은, 그가 발톱을 깎고 주류영화에 영합했다는 일부 평론가들의 실망을 순진한 속단으로 보이게 한다.

“아냐 그건 꿈이 아니었어. 그곳은 정말 있었어. 살아있는 진짜 장소였어!” 오즈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도로시는 꿈을 꾼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도리질을 쳤다. 모험의 기억은 하루하루 멀어져갔겠지만, 도로시와 돈키호테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후예인 한 여성의 놀라운 나들이를 그린 <너스 베티>에서, 우리는 언제든 넓은 바다로 항해할 수 있도록 부두로 나가 서 있는 우리의 도피 욕구와 센티멘털리즘을 본다.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