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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O.S.T
2002-07-23

기억의 자궁 속으로 자맥질하기

곽경택 감독은 추억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잠수부다. 그 점이 맘에 들고 또 맘에 걸린다. 이번 영화는 구조 자체가 끝없이 과거의 심해로 자맥질해 들어간다. 나 역시 그 일요일 낮의 기억을 영화를 통해 되살린다. 김득구가 레이 붐붐 맨시니와 혈투를 벌인 뒤 혼수상태에 빠지던 날 말이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으로 당시를 영화 속에 재현하고자 노력한다. 또 영화 속의 김득구는 끊임없이 어린 시절의 바다로 자맥질해 들어간다. 영화가 끝난 뒤 자막 올라갈 때 흐르던 음악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일동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MBC 스포츠’로 타이틀을 바꾼, 매주 일요일 밤에 하던 권투시합 때마다 나오던 음악이다. 최고의 타이틀 선곡이라고나 할까. 음악이 당당하고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영화를 보며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 시절을 풍미한 이 타이틀 음악을 들으며 거의 전율했던 초등학교의 기억 때문이다. 이 음악이 흐른 뒤,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고 외치는 영양제 광고를 비롯한 CF가 끝나면 그 누구도 예상 못할, 실제로 상대를 죽일지도 모르는 피터지는 주먹의 대결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음악을 엔딩에 쓴 것을 보면, 곽경택 감독이 (주로 미디어를 통해) 문화적으로 공유된 과거의 기호들에 많은 관심과 굉장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라면 먹고 간다 물배 채우고 간다’로 시작하는, 박진영이 만들고 god가 부른 주제가는 북과 징, 꽹과리 같은 국악기들과 힙합적인 그루브를 얽은 수작이다. 거칠게 받은 소리들이 헝그리정신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윤민화를 비롯, 여러 사람들이 만든 스코어도 비교적 느낌을 압축해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오는 김영동의 <바람의 소리>는 혼을 불러내는 듯한, 과거를 끌어내는 듯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O.S.T에는 뜻밖에도 god의 노래가 두곡, 보너스 트랙으로 들어 있다.

김득구의 로드워크신에 쓰인 <태권브이> 주제가는 이질적인 것들을 덧대어 관객을 과거의 한 공간으로 불러들이는 유쾌한 상상력의 소산이다. 버스에 탄 여자친구를 따라 남산 순환도로를 뛰는 김득구와 함께 우리는 아이가 된 심정으로 과거의 한때로 간다. 그러나 문득 김득구의 경기가 TV로 중계되던 그 시기를 떠올리면 이건 너무 아늑한 유년의 느낌이다. 자, 그러고나서 생각하니, 이 영화가 기억의 난파선에서 김득구를 건진 뒤 제대로 수면 위로 올라왔는지가 좀 의문이다. 김득구라는 유물이 너무 무거웠나. 아니면 올라오려는 의지가 조금 부족했나. 따뜻한 심해=자궁 속? 만일 그가 김득구를 제대로 건져올리려 했다면 현재와 그 시대를 연결시키는 의식, 다시 말해 ‘역사의식’이 좀더 필요했다. 심하게 말하면, 그 일요일 오후에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영화는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날 이후 알주먹 두개와 마우스 피스를 악문 하악골의 독기만으로 세계 챔피언이 되곤 하던 선수들에게 열광하기보다는 고비용의 좀더 체계화된, 이를테면 프로야구 같은 스포츠로 관심을 옮겼다. 독재자는 여전히 스포츠를 악용했지만 약아빠진 5공 군바리들은 이제 그 쾌락의 과정을 본격적으로 시스템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목을 건드리지 않으면, 김득구라는 과거는 너무 무겁게 아름답다. 그래서 그 난파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감독은 무거운 김득구를 껴안고 꿈을 꾼다.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