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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영화 회고전 - <인재를위하여>외
2001-03-28

<인재를 위하여><황무지><오! 꿈의나라><친구여 이제는 내가 말할때>

1987년 6월10일 경찰, 민주당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난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봉쇄, 전국 18개 도시 가두시위.

“대학영화에 첫 시련이 닥쳤다. 86년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부활하는 산하>의 상영으로 연세대 총학생회에

일제 검거령이 내려졌다.… 수사기관은 이 영화 제작의 배후로 서울영상집단(서영집)을 지목,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서영집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서영집이 제작한 <파랑새>에 대해 영화법 심의 조항을 문제삼아 홍기선, 이효인을 구속했다. 그러나 <파랑새> 사건은 ‘뜻밖에도’

대학영화패의 연합체 결성의 계기로 작용했다.… 87년 5월 경희대 그림자놀이, 고려대 돌빛, 상명여대 얼레 등 13개 대학영화패가 모여 대학영화연합(대영연)을

결성한다.… 대영연 결성 취지로 “이 땅에 존재하는 검은 먹구름의 실체인 미국문화를 과감히 걷어찰 민족영화의 창달”을 선언하고 있다.… 대영연은

87년 12월에는… 전국영화과연합회와 공동 주최로 ‘열린 영화를 위하여’라는 영화제를 개최한다.… 이후 대학가에서는 소형단편영화제는 축제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가 되기도 했다. 또한 88년 초에는 표현의 자유 쟁취와 직배 반대를 위한 거리 시위를 주도하면서 시대에 적극 개입한다.”

-<씨네21>88호, 당시 서울영상집단에 있던 이현정씨의 ‘굴레를 벗어나 광활한 영상세계로’중에서

“제가 86학번으로 들어갔는데. 85년 가을 정도에 각 학교 영화 서클들이 다발적으로

만들어졌죠. 그때 선배들은 독립영화를 ‘작은 영화’로 가르쳤어요. 그 개념에는 사회비판적인 대항 영화라는 뜻이 들어 있었지요. 86년 겨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시위현장을 찍으러 다녔어요. 자연스레 사회성 있는 영화들을 고민하게 된 거죠. 자연스럽게 다른 학교의 움직임들을

보게 됐던 것도 큰 도움이 됐고…. 처음엔 책으로 시작을 했고요. 같은 영화진흥공사에서 출간한 뭐 그런 책들도 들여다 봤고.

신촌에 우리마당이 있었는데, 워크숍을 듣고온 선배 중심으로 작업을 하곤 했어요.”

-8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의 풍경에 관한 장윤현 감독의 말 중에서

■<인재를 위하여> 8mm/ 컬러/ 45분/ 1987년/ 장윤현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시절 장윤현 감독이 만든 <인재를 위하여>는 91년 나온 이상인 감독의 <어머니, 당신의 아들>과

더불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에 주목한 작품이다. 8mm필름의 조악한 화질과 불량한 녹음상태가 실습작품다운 면모를 드러내지만 <인재를

위하여>는 당시 대학영화 가운데 인기있던 단편이다. 대학생인 주인공은 불온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취조실에서 젊은 형사의 고문을 받는다.

뭔가 한건 올려 진급하겠다는 의지에 불타는 형사는 멋모르는 대학생을 조직사건 관련자로 몰아세우며 두들겨패고 물을 먹인다. 대학생은 고문을

당하는 순간순간 학교의 기억을 떠올린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선배에게 나약한 모습만 보이던 그는 형사의 물리적 폭력에서 외면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법정에서 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당당한 최후진술을 한다. 창백하고 갑갑한 취조실 풍경과 푸르고 넓은

대학 캠퍼스 모습이 교차될 때 마음의 감옥을 만들어야 했던 80년대 정서가 되살아나는데 영화는 계속 두 공간을 오가며 인물의 심리를 추적한다.

콜라와 햄버거와 헤비메탈을 좋아하면서 어떻게 민중의 편에 설 수 있냐는 순진하고 어리숙한 질문에서 그 무렵 대학생들의 고민이 드러나기도

한다.

단편영화를 ‘작은 영화’라 부르며 대안영화로 여기던 시절 만든 작품이지만 <인재를 위하여>에서 미학적 도발 같은 건 없다. 오히려 기존

극영화작법을 충실히 따른 영화이고 그래서 당시 대학생들이 좋아할 수 있었다. 형사의 고문장면마다 마이클 잭슨의 ‘Beat It’이 흘러나오고

영화의 시작과 끝은 안전하게 닫혀 있다. 물론 당시로선 이런 구성과 연출도 신선한 것이었다. 스틸사진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면서 고속촬영 효과를

낸 장면도 흥미롭다. 후일 <접속> <텔미썸딩>으로 흥행감독이 된 장윤현의 대중적 감각이 드러난다고 할까. 장윤현 감독이 직접 출연, 대학

시절 그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

■<황무지> 16mm/ 90분/ 컬러/ 1988년/ 김태영

그가 몸을 불사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80년 광주에서 한소녀를 학살한 김의기는 도피중에 미군에 부대끼는 사람들을 알게되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오! 꿈의 나라> 16mm/ 90분/ 컬러/ 1989년/ 이은, 장동홍,

장윤현

장산곶매라의 첫 번째 장편영화,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뤘고 전국 150개 상영공간에서 총 500회 이상 상영,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함,80년대

말 독립영화 히트작이 됐다.

■<친구여 이제는 내가 말할때>16mm/ 30분/ 컬러/ 1989년/ 이상인

이상인 감독이 청년을 결성하기 전 만든 단편영화.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만든 단편 <탈>로 MBC 대학생 영상콘테스트에서 동상을

받기도 했던 이상인 감독은 80년대 말 강한 사회비판 영화들을 내놓기 시작하는데, <친구여 이제는 내가 말할 때> 역시

<깡순이> 등과 함께 꼽히는 전형적인 선전, 선동영화. 하지만 혼자 만들어낸 작품치곤 매끈한 솜씨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