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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전쟁의 발라드, <학이 난다>
2002-07-24

1950년대 중반 이후 소련의 영화가 당시 소련의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해빙’의 거센 물결 속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그 영화들이 그려낸 전쟁이 잘 확인해준다. 다소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그 이전 시기의 소련영화들, 그러니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 아래서 만들어진 소련영화들에서 전장(戰場)은 영광이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거기서 인민들은 대의를 위해 투쟁을 벌였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반면 ‘해빙기’의 영화들은 이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전쟁을 바라보았다. 이전의 영화들이 집단을 강조했다면 해빙기의 영화들은 개인에 주목했고, 이전의 영화들이 영광의 전장을 그렸다면 해빙기의 영화들은 고통의 전장에 눈을 돌렸다. 그럼으로써 전쟁이란 개인들에게 참기 힘든 고통과 상실을 남겨주는 것이라고 해빙기의 영화들은 말했다. 미하일 칼라토조프 감독의 <학이 난다>는 그리고리 추크라이 감독의 <어느 병사의 발라드>(1959)와 함께 ‘수정주의적’인 시각으로 전쟁을 들여다본 1950년대 소련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추는 듯 뛰어가는 두 청춘 남녀를 보게 된다. 그들 두 사람, 보리스(알렉세이 바타로프)와 베로니카(타탸냐 사모일로바)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은 그들의 즐거워하는 표정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V자 대형을 만들어 하늘을 날아가는 새떼를 바라본다. 아마도 그때 그들은 그것에서 희망과 자유의 (구태의연한) 상징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산 마카베예프가 1966년에 만든 영화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인간은 새가 아니다’. 갑작스레 닥쳐온 전쟁의 불안한 그림자는 그들을 보리스와 베로니카를 갈라놓고 또 그것만으로 모자라 그들에게서 희망이란 것마저 앗아가버린다. 군에 지원해 전장으로 떠난 보리스는 그만 죽음을 맞고 만다. 한편 보리스와 헤어져 상심해 있던 베로니카는 폭격으로 인해 부모를 잃게 된다. 게다가 그녀는 예전부터 자신에게 구애해오던 보리스의 사촌 마크(알렉세이 슈보린)로부터의 유혹에 굴복당하고 결국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보리스의 전사 사실을 알지 못하는 베로니카의 마음속에는 보리스에 대한 간절함, 그리움이 여전히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쟁을 바라보는 <학이 난다>의 시선은 꽤 냉정해 보이는 면이 있다. 이를테면 영화는 과단성 있게 전장에 뛰어든 보리스의 죽음을 영웅적인 행위이기는커녕 그저 돌발적인 사건 정도로 묘사한다. 찬양할 만한 전쟁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뇌물을 준 대가로 입대를 하지 않는 인물(마크)을 통해 ‘시스템’의 허점을 슬쩍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속의 이런 신선한 시각이 더 심화되지 않고 ‘소묘’에 머물고 마는 것은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베로니카와 전쟁으로 인해 그녀가 겪어야 하는 감정상의 고통에 관심을 쏟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쁜 것은 베로니카를 연인과 이별하게 하고 그래서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전쟁을 가지고 눈물을 빚어내려는 이 멜로드라마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스토리는 진부할뿐더러 허점도 갖고 있다. 예컨대 베로니카가 마크와 결혼을 결심하는 장면이라든가 그녀가 ‘이별’을 만드는 전쟁에 대한 증오를 잊지 말자는 한 군인의 연설에 감응해 ‘극복’의 국면에 접어드는 마지막 장면은 보는 사람의 감정을 파고들겠다는 노골적인 의도만 드러낼 뿐 설득력은 부족한 편이다.

<학이 난다>가 장르의 관성에 의해 스토리를 끌고 가는 멜로드라마라면, 또한 이것은 시각적 스타일의 참신함으로 그런 관성을 너끈히 이겨내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종군 촬영기사였던 세르게이 우르세프스키가 든 카메라는 선명한 딥 포커스의 공간을 전후좌우를 막론하고 거칠 것 없이 이동해간다. 그렇게 전체적으로 화려한 시각 스타일을 고수하는 영화는 특히 감정적 위기의 순간에 스타일의 자만심을 더욱 부각시킨다. 예를 들어 폭격이 있던 날 밤 마크가 베로니카에게 유혹의 마수를 뻗치는데, 영화는 이 장면을 그림자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보는 사람을 시각적 쾌락과 감정적 불안감이 뒤섞인 묘한 상황 속에 빠뜨려버린다.

가끔은 관객으로 하여금 베로니카의 처지에 공감하게 하면서 한숨짓게 하고 자주 매혹적인 스타일로 관객을 짓눌러버리기도 하지만, 당시 50대의 중견 감독인 칼라토조프(1903년생)가 만든 <학이 난다>를 ‘새로운 영화’로 규정하긴 힘들다. 여하튼 이 영화가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국제적으로 주목을 끈 건 사실이다. <학이 난다>가 가장 찬사받은 1950년대의 소련영화인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지위는 1962년 전쟁을 다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좀더 새로운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에 양도되기 전까지만 굳건한 것이었다.

Letjat zhuravli/ The Cranes Are Flying, 1957년

감독 미하일 칼라토조프

출연 알렉세이 바타로프, 타탸냐 사모일로바

자막 한국어, 러시아어, 영어

오디오 돌비 디지털 5.1

화면포맷 4:3 풀스크린

출시사 스펙트럼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