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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 세상을 향해 쏴라!
2001-03-29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1991년,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지나 데이비스, 수잔 서랜던

ebs 3월31일(토) 밤 9시

“두명의 여자가 범죄의 향연을 벌인다. 난 이 아이디어가 내 인생을 바꾸어놓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신출내기 시나리오 작가에 불과했던

캘리 쿠리가 각본을 쓴 <델마와 루이스>는 그녀 표현대로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방송용 대본작가 출신의 캘리 쿠리는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으며 영화는 거센 논쟁을 일으키면서 <타임> 표지를 장식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서 ‘감독’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블레이드 러너>와 <블랙 레인> 등 작품에서 주로 시각적 디자인에 많은 공력을 쏟아붓곤 했던 감독이 <델마와 루이스>에선

스타일리스트의 면모를 자제하고, 대본에 충실하게 연출하는 기능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엔 당시 신인에 불과하던 브래드

피트가 등장하고 있는데 여성 관객을 위한 눈요깃감으로 분해 그의 육체를 전경화하면서 서비스한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상업영화 감독의

본분에 다소 강박적으로 얽매이곤 하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웨이트리스 루이스는 고교 동창인 델마와 함께 주말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도중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어간 술집에서 불의의 사고가

발생한다. 델마가 엉겁결에 강간당할 위기에 처하자 루이스는 권총으로 남자를 쏴죽인다. 그들의 여행은 이때부터 도피의 여정으로 돌변한다.

루이스는 애인에게 도피자금을 요청하고 델마는 루이스와 멕시코로 도망칠 것을 결심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찰의 수사망은 점차 좁혀오고 두

사람은 그랜드 캐니언의 벼랑 끝에 몰린다. <델마와 루이스>가 남성적인 버디영화의 변형이라는 점을 눈치채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내일을

향해 쏴라> 같은 영화를 여성영화의 틀 안에서 뒤집고 재구성한 것이다. 영화는 평이한 로드무비에서 출발해 탈주영화와 액션영화의 규범을 끌어들이면서

활기를 띤다. 영화 종반으로 갈수록 평범한 가정주부와 웨이트리스에 불과하던 델마와 루이스라는 여성들은 서부극에 나오는 반영웅 정도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페미니즘 비평가들이 영화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화를 보노라면 “너 오늘밤 늦게 들어오면 알지?”라며

협박조로 일관하는 델마의 남편 같은 인물은 남자가 봐도 속뒤집힐 지경이다.

<델마와 루이스>의 영화 속 캐릭터는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기실 영화의 모든 흡입력은 치밀하게 구성된 캐릭터에 근원을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평가 콜렛 모드는 “영화의 남자 캐릭터는 대부분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있으며 책임감이나 의리 등은 역할 뒤집기 과정을 통해

주로 여성 캐릭터에게서만 발견된다”고 썼다. 영화에서 델마, 그리고 루이스는 친구이자 심리적인 모녀관계를 형성한다. 영화 초반엔 지나 데이비스가

연기하는 어리숙한 델마가 루이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런데 점차 관계가 역전된다. 어느새 델마는 볼품없는 가정주부에서

총을 든 여걸로, 그리고 루이스라는 여성을 챙기고 보살피는 인물로 눈부시게 변화해간다. 캐릭터라는 것을 기계적인 조합내지 영화의 부속품

정도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일종의 ‘유기체’로 본다면, <델마와 루이스>는 그 탁월한 예시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