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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오! 컬트 <내차봤냐?>
2002-07-31

너 또 필름끊겼냐?

이 비디오를 집은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만약 <자동차 대소동>이라거나 <내 자동차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류의 제목이었다면 그냥 스치고 지나갔을 것을, 나는 제목의 호방함에 기가 질려 비디오 앞에서 “어…, 저기…, 죄송한데요, 못봤는데요” 이야기할 뻔했다. 케이스를 열어봤더니 원제는 한술 더 떠 “띨빵아 내 차 봤냐?”(Dude, Where’s My Car?)다. 거침없음과 버르장머리없음에 있어 최근 내가 열광하는 김남일 어록과 맥을 같이하는 제목의 이 비디오를,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술마시고 필름 끊기는 습관이 있는 폭력적 애주가들에게 이 비디오를 권한다. 술마신 다음날 자신의 차가 어디 처박혀 있는지 기억 못하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기나긴 만취의 퍼레이드 동안 수십만달러의 돈다발이 들어 있는 가방을 훔칠 수도 있고, 가전제품 포장용 딱딱이(에어캡) 비닐로 만든 우주복 차림의 외계인들의 음모에 휩쓸릴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본의 아니게 단지 취했다는 이유로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단히 교훈적인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그건 그렇고, 흥미로운 건 주인공인 두명의 두드다. 이미 <아메리칸 파이>와 <로드 트립>에서 머릿속에 뇌수 대신 테스토스테론을 만빵으로 채우고 다니며 전세계에 얼굴을 알린 체스터(션 윌리엄 스코트)와 제시(애쉬튼 커처)가 그들. 예쁜 여자를 보면 혀가 땅바닥까지 내려오면서도 그 여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들에게 말을 붙일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냉철한 지성의 얼간이들이다. 이들은 피자가게 배달원으로 늘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며 “끝내주는 꿈을 꿨어”, “뭔데?”, “기억이 안 나”, “어, 그래.”(히죽) 따위의 대화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웨인즈 월드>를 비롯해 <엑설런트 어드벤처>나 <덤 앤 더머>, 최근 나온 <악마같은 여자>에 이르기까지 얼간이 또는 루저 커플이 등장하는 버디(?)무비는 할리우드 코미디영화의 주요한 계보 가운데 하나가 된 것 같다. 돈도, 변변한 직업도 없고, 취향이라야 한물간 가수에게 열광하며, 여자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지만 2∼3년 동안 여자 냄새라고는 맡아보지도 못한 청춘들. 일탈도 반항도 하지 않지만 존재 그 자체만으로 거대한 종량제 쓰레기 봉투를 필요로 할 것 같은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이런 캐릭터들은 매력적이다(나만 그런가?).

이런 인물들은 사회인으로, 생활인으로 가져야 할 마지노선이라는 게 없다. 배달해야 할 피자 더미를 가지고 파티에 달려갔다가 직장에서 잘려도 그만, 사람들 앞에서 실수만발로 사고를 쳤다가 “쟤, 왜 저러니?” 손가락질 받으며 왕따를 당해도 그만이다. 그러고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시덥지 않은 농담에 열중하며 좋아라 한다. 옆에 이런 동료나 동생이 있다면 한숨이 푹푹 나오겠지만 스크린에서 보는 그들은 이런 어눌함과 천진함으로 일상에 갇혀 있는 이들이 가진 욕구의 변비현상을 뚫어준다. 따져보면 이들은 몸뚱이 하나로 지구를 구하는 영웅 캐릭터 못지않게 ‘판타스틱’한 인물들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스크린에 얼간이 남자들은 넘쳐나는 데 얼간이 여자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실제 성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해서 얼간이 여성이 존재할 확률이 지극히 낮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럽고 게으르고, 주접스러움이 유쾌해질 수 있는 건 남성의 경우에만 해당되기 때문일까? 주위를 돌아보건대 무질서와 난장판 근성에 있어 남자들의 기를 질리기 만드는 여자 친구와 동료들을 상당수 확보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것이 알고 싶다.김은형/ <한겨레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