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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오!컬트 <배틀로얄>
2002-08-07

생존자는 하나면 족하다. 대통령이 하나이듯

‘당신을 만난 뒤로 나는 배가 불러왔어. 당신을 만나려고 작정하고 찾아갔어.’‘당신의 아이가 여기 있어요. 당신의 아이를 책임지세요.’‘책임져요 (닥쳐!) 책임져요 (내 새끼가 아냐!)’

이것은 황신혜밴드의 97년 데뷔음반에 수록되었던 <문전박대>라는, 내가 만든 노래의 가사다. 가사의 내용으로 보면 미혼모가 배신을 당하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 노래를 만들게 된 동기는 대졸 실업자들이었다. 당시에 나는 홍대 앞에서 ‘곰팡이’라는 다소 괴상한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의 ‘죽돌이’ 중에는 대졸 실업자들이 많았다.

그 당시는 ‘일류대 졸업장만 따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공식의 효용가치가 점차 만료되던 시절이었다. 왜냐하면 90년대는 ‘공부 못하는 날라리’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소비 패턴이 점차 바뀌는데, 큰 장사꾼들은 세상에는 공부를 못했던 인간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고 그들을 소비자군으로 포섭하기 위해서 일류대 범생 출신보다는 ‘남다른 감각’과 ‘창의력’을 가진 신세대를 원하기 시작했다. 바꿔 말하면 일류대 출신은 주입식 교육의 천재일 뿐 소비자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부하기 싫어하며 놀고, 먹고, 입고, 싸는 이들’의 취향을 헤아려낼 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일류대를 통과했다는 알리바이만으로 그 능력을 인정해 주기에는 무리가 따르게 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기까지는 배가 터져도 골백번은 더 터질 지경으로 주입식 교육을 반항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다 받아먹었다. 초·중·고 12년 하고도 대학 몇년을 더 다니면서 부모님과 선생님만 믿고, 외우라는 것 다 외우고, 시키는 대로 다하고 나서 그 잘난 졸업장 들고 취업을 하려고 하니 이제 와서 ‘창의력’이 필요하다는 등 없던 소리를 해대며 문전박대를 하더란 말이다. 그렇게 문전박대당한 순진했던 범생들은 출세빙자강간죄의 혐의가 있는 주입식 교육의 사생아들이었다.

학교란 것이 본디, 패배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만든 곳이다. 하나의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은 한명이면 되고 그 밖에 수백만, 수천만, 수억의 국민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어렸을 때 희망했듯이 ‘이담에 크면 대통령이 될 테예요’라는 소원이 모두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국가란 것이 존립할 수 있겠는가. 그 꿈둥이들이 자라나면서 점차, 나는 대통령은 못 되겠구나- 국회의원도 쉬운 건 아니네- 서울에 있는 대학만 가도 소원이 없겠다- 아무 데고 취업만 되면 더이상 바랄 게 없어요 순으로 점차 패배에 익숙해지도록 해서 성인이 될 즈음에는 궂은일도 마다않는 착하고 성실한 국민이 되도록 집요한 프로그램으로 조련하는 곳이 바로 학교란 것이다.

학교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세금을 잘 낼 수 있는 인간’만을 제조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학교에서도 ‘행복학’이라든가 ‘자아탐구’ , ‘사교, 연애’라는 과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지식이랄 수 있는 육아와 원만한 결혼생활, 좋은 아빠되기,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는 방법, 친구와 주변 사람들과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교육은 하나도 없다. 오로지 끊임없는 상대평가를 통해서 인간의 가치에 차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패배의식과 보복심리를 동시에 갖춘 ‘자본주의 전사’를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영화 <배틀 로얄>이 개봉하는 데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것은 폭력성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사실들을 상징하고 있는 진실성 때문이다.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리더 http://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