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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거리 위의 인간해부도, <클루트>
2002-08-14

<해리슨 포드의 의혹>(1990),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마라>(1992), <펠리칸 브리프>(1993), <데블스 오운>(1997) 같은 범작의 스릴러영화만을 연이어 내놓은 90년대의 앨런 파큘라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그는 별로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평범한 영화감독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70년대에만 해도 파큘라는 당시 등장한 할리우드의 영화감독들 가운데 재능면에서 보자면 단연 앞줄에 서 있다고 말해도 될 만한 인물이다. 그는 특히 캐릭터의 심리를 꿰뚫어볼 줄 알고 이와 더불어 인물들이 놓여 있는 환경을 세밀히 관찰하는 예리한 시선의 소유자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파큘라의 두 번째 영화인 <클루트>는 전성기 파큘라의 그런 영화적 재능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명실상부한 그의 대표작이다.

의문의 실종사건이 영화의 출발지점 노릇을 한다. 펜실베이니아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사는 대기업 간부 톰 그룬만이 6개월 전 뉴욕에 갔다가 아무런 소식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FBI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그를 찾을 수 있는 단서라고는 단 하나, 아마도 그 자신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음란한 내용의 편지 한통밖에 없다. 이 편지는 뉴욕의 ‘유능한’ 콜걸인 브리 대니얼스(제인 폰다)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단서 하나만을 가지고 톰의 친구인 사립탐정 존 클루트(도널드 서덜런드)가 톰을 찾으러 뉴욕으로 향한다. 처음에 클루트가 영 못마땅하기만 했던 브리는 누군가 자신을 뒤쫓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난 뒤에야 도와달라는 클루트의 요청에 마지못해 응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클루트>는 ‘과연 톰은 왜 행방을 감춘 것인가?’, ‘브리에게 괴전화를 걸며 그녀를 은밀히 쫓아다니는 자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녀는 톰의 실종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스토리를 전개시켜가는 영화다. 그러니까 굳이 장르를 따진다면 스릴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영화다.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사실 이 영화는 고압의 스릴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편이라 팽팽한 긴장감을 잔뜩 기대하는 이들에겐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영화는 스릴러영화의 기본 코스를 그대로 밟아가지만 그 코스를 바삐 달려가면서 밀도 높은 스토리를 만들어낸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길을 머뭇거리는 듯 걸어가며 여하튼 스릴러치고는 다소 느슨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쪽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물론 <클루트>의 머뭇거리는 듯한 발걸음은 나름의 정당한 이유를 가진 것이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스릴러영화의 흥미진진한 기본 코스와 그 위를 달려가는 속도감을 보라고 재촉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코스와 다음 코스 사이를 지나가는 발걸음(혹은 시선)에 주목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클루트>는 범죄, 마약, 매춘으로 넘쳐나는 사악한 공간으로서 뉴욕이란 도시를 둘러보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주인공 클루트와 브리를 들여다보라고 권유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우선 뉴욕이란 대도시엔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탐정으로서 비상함보다는 어눌함이 먼저 엿보이는 클루트는 말 그대로 캐릭터 연구의 대상이 됨직한 인물이다. 하지만 <클루트>는, 제목을 ‘브리’라고 바꿔야 오히려 알맞다고 해야 할 만큼 브리라는 캐릭터의 관찰에 좀더 집중하는 영화다. 그녀는 (매춘)여성으로서 느낄 법한 어떤 모순 혹은 딜레마를 잘 보여주기에 관객으로 하여금 기꺼이 관찰해보고픈 생각이 들게 하는 인물이고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며 매력적인 인물이다. 예컨대 ‘성공한 콜걸’인 브리는 ‘판타지’를 만드는 ‘직업’세계에서만 남성들을 주도할 수 있을 뿐 현실세계에서는 전혀 그런 처지가 못 되는 유약한 존재이다. 영화 속에서 그처럼 상충되는 면모들을 잘 보여주는 이 입체적 캐릭터를 두고 영화사상 가장 기억할 만한 매춘여성 캐릭터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과장만은 아닐 듯싶다.

당연히 이건 브리라는 이 캐릭터를 스크린 위에 훌륭하게 살려낸 제인 폰다가 있었기에 가능해진 이야기이다. 영화평론가 폴린 카일의 말을 빌리자면 <클루트>에서의 제인 폰다는 정말이지 제인 폰다가 아니라 브리 자체라고 해도 말해도 될 만큼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폰다의 호연에 대해 리자 슈와츠봄이란 평론가는 “그녀의 연기는, 폰다 연구자가 그것을 분석하는 데 수년을 보내도 될 만큼의 설득력과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쓰기도 했다. 폰다의 경력에서 보자면, 오스카 트로피(여우주연상)를 안겨준 이 영화로 폰다는 이전의 ‘섹스 키튼’(sex kitten) 이미지에서 벗어나 깊이를 갖춘 연기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Klute 1971년, 컬러감독 앨런 J. 파큘라출연 제인 폰다, 도널드 서덜런드자막 영어, 한국어, 불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일본어, 베이징어, 타이어오디오 모노화면포맷 2.35:1 와이드 스크린출시사 워너브러더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