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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에 출연한 류승완 감독이 훔쳐본 감독 이창동,인간 이창동(1)
2002-08-16

따뜻한 카리스마, 그의 곁에 머물고 싶다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 출연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박하사탕> 때부터 제작자인 이스트필름 명계남 대표도 출연시켜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오아시스>에 류승완 감독이 출연한 것은 의외다. 주인공 홍종두(설경구)의 동생 종세 역을 맡아 세번, 그것도 제법 길게 나오면서 대사도 많이 하니까 카메오가 아닌 조연이다. 류승완 감독의 출연 목적 중에는 이창동의 연출 비법을 훔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그가 총 10회 촬영 동안 현장에 나와, 열심히 훔쳐본 이창동은 어떤 감독, 어떤 사람일까. 류감독의 말을 받아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이창동 감독과의 인연 99년 25회 한국독립단편영화제에서 내 단편영화 <현대인>이 상받을 때 이창동 감독님이 심사위원장이셨다(이하 존칭 생략). 얼마 뒤 서울극장에서 먼발치에서 봤을 때 “아, 거장의 이미지가 저런 거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수년 동안 안 바뀌는 헤어스타일, 그 히틀러 가르마! 느린 걸음, 사람을 쏘아보는 시선! 인사하고 싶어도 단편영화제 응모생 신세에 자세가 안 나올 것 같았다. 계속 그랬다. 먼발치에서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오아시스> 조감독 중 한명이 내 친구와 형동생하는 사이였다. 친구 통해서 연락이 왔다. 이창동 감독이 나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베드신 같은 거 없는 거지?” 묻고는 없다는 걸 확인하고 이 감독을 찾아갔다. 왜 베드신이 싫냐고? 애엄마가 싫어하니까. 쑥스럽기도 하고. 이스트필름에서 이 감독을 만났을 때 아주 자상했다. 시나리오를 주면서 그랬다.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끼리 시나리오 주고서 거절당하는 기분을 알 테니까 웬만하면 하자.” 내가 물었다. “저는 친구들 하고 노는 기분으로 출연한 것 빼고는 다른 감독 영화 출연한 적 없거든요. 저를 통제할 수 있으시겠어요?”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이 감독은 아주 유머러스하게 오케이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됐다. 첫째, 시나리오가 재밌었다. 종두 캐릭터가 좋았고. 한국영화에서 그런 캐릭터 있었나? 시작부터 끝까지 뭔 짓을 할지 예측이 불가능한 인간. 종두가 공주 아파트 앞 나뭇가지 자르는 대목부터 이어지는 끝장면의 해피엔드가 너무 좋았다. 둘째, 초급 연출가로서 이 감독 영화를 볼 때 조연들의 연기가 너무 생생했다. 지금도 송강호 선배 연기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게 <초록물고기>에서의 양아치다. <박하사탕>도 조연들이 모두 빛난다. 그 연출 비법을 빼내고 싶었다. 연출부 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내가 배우로서 직접 디렉션(감독의 지휘)을 받는 거다. 공포의 이창동 권법

처음 현장 나가면서부터 틈틈이 비법을 엿봤다. 가장 놀란 건 “집에서 시나리오 많이 읽고 오지 마라”는 거였다. 비어 있는 상태에서 연기 방향을 함께 잡으면 쉬운데, 혼자 열심히 읽고서 방향을 잘못 잡아 오면 고치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현장상황 안에 빠져들어라, 그 안에서 같이 살자.” 또 이랬다. “대사할 때 평상시처럼 말을 해라. 괜한 감정 넣거나 의식해서 대사치지 말고.” 이렇게 명확한 디렉션이 있을까. 나는 연출할 때 대사의 강세를 어디에 넣어라, 어휘를 어떻게 틀어라는 식으로 하는데. 이 감독은 현장을 능수능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지휘했다. 나는 그가 소설가였을 때보다 학교 선생님이었을 때가 궁금하다. 사람 대할 때 긴장과 이완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그 솜씨는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통제하면서 익힌 것 아닐까. 나는 원래 세번 출연하기로 돼 있었다. 많으면 다섯번? 세번 촬영을 다 했는데 전부 다 재촬영한다고 했다. 솔직히 짜증났다. 앞의 것도 힘들게 찍었는데. 이 감독은 처음에 “이번 영화는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모습을 핸드헬드로 포착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일 가벼운 아톤기종 카메라까지 빌렸다. 그래놓고는 삼각대 위에 얹혀 놓고 찍었다. 그러더니 재미없다고 다시 찍겠다는 거였다. 자기 딜레마에 빠진 것 같았다. 나 같으면 쪽팔려서 다시 찍자고 못할 것 같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건데, 무척 놀랐다. 집요하다. 뚜렷하게 방향이 서 있는 게 있으면 그게 나올 때까지 계속 가는 건 물론이고, 스스로도 꿰지 못한 게 있을 때도 어떻게 해서든 찾아낼 때까지 밀고 간다. 그럼 조연을 잘 만드는 비법이 뭘까. 한마디로 하면 나올 때까지 하는 거다. 내가 대사를 치려고 하면, 계속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연출한다. 그 상황에서 살 수밖에 없게 만든다. 대사를 열번 반복하면 지치게 마련. 그러면 대사는 이미 머릿속에 박혀 있고, 어느 순간에 나온다.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자기 말이 튀어 나온다.

답답했던 건, 내게는 특별한 지시를 안 주는 거였다. “다 알면서 뭘 그래?” 내가 뭘 안단 말인가. 그는 배우를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가게 만든다. 무조건 친절한 게 아니라 불친절을 수반하면서 배우 스스로 그 역할에 대한 생존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배우가 그걸 안 하면 현장이 공포스러워 못 견딘다. 물론 촬영 뒤에는 배우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와! 독한 사람이구나.경찰서에 온 문소리씨를 찍을 때 문씨는 뇌성마비 장애인 연기로 체력이 소모돼 거의 거품물고 나가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나 같으면 더 못 찍는다. 그는 한번 더 찍자는 말을 태연하게 했다. 그런 감독들 있다. 박찬욱 감독도 <복수는 나의 것> 찍을 때 뇌성마비 장애인 역을 한 류승범에게 그랬다. “승범아, 힘들지?” “예!” “한번 더 할까.” 어느 연기학원 현판에 “연기는 기다림의 예술”이라고 써 있다. 배우의 연기가 원하는 만큼 나올 때가지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 같으면 A가 안 나오면 못 참고서 B를 선택해 A마이너스에 가깝게 하려고 할 텐데. 그는 기다린다. 감독이 기다리니까, 배우도 기다린다. 기다리니까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살게 된다. 종두가 처음 감옥에서 나왔다가 무전취식으로 잡혀온 걸 인천경찰서에서 찍었다. 이 감독이 형사반장에게 약간의 자문을 구했다. 그때 형사반장이 시연 비슷하게 하면서 종두, 설경구를 달래는 거였다. “감옥에서 나오면 집에 가야지, 안 그래” 하는 식으로. 원래 시나리오는 경찰이 무섭게 다그치는 것이었는데, 이 감독은 바로 접수했다. 형사반장에게 그 역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형사반장이 먼젓번과 달리 연기하는 거였다. 바로 공포의 이창동 권법에 걸려서 말이 나올 때까지 하고, 또 하고…. 결국 말이 나왔다. 경찰서는 재밌는 곳이다. 이렇게 말하면 욕하는 사람들 있을지 모르지만. 종두가 강간범으로 지목돼 끌려오고 가족이 다 경찰서에 출동하는 부분은 부산경찰서에서 찍었다. 진짜로 경찰서에 잡혀온 사람들이 떠들고 싸우고, 촬영이 오래되다 보니 그 사람들도 늘어나고. 스탭이 ‘슛!’ 하니까 한 형사가 싸우던 사람들에게 “슛 간단다, 임마!” 하고 외친다. 이내 조용해진다. 형사계 데스크에서 사건 접수하는 형사도 전화받다가 “촬영간다, 임마, 끊어라!” 그런다. 그 사람들 고맙다. 나도 한 칭찬 들었다. 공주 오빠에게 “니가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새꺄!” 할 때 한 형사 왈 “배우는 배우네, 똑같애.” ▶ <오아시스>에 출연한 류승완 감독이 훔쳐본 감독 이창동,인간 이창동(1)

▶ <오아시스>에 출연한 류승완 감독이 훔쳐본 감독 이창동,인간 이창동(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