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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교정 <어색해도 괜찮아>
2002-08-26

일상성, 마음의 벽을 허물다

마치 에로비디오영화의 전략적 제목짓기를 흉내낸 것처럼 보이는 ‘강한’ 남성지향 만화들의 덜떨어진 제목에 비해 여성작가들의 만화제목은 매력적이다. <호텔 아프리카> <바람의 나라> <불의 검> <스타가 되고 싶어?>처럼 제목을 떠올리면 작품이 오버랩되는 잔잔하면서도 강한 힘을 느끼게 해준다. 권교정 역시 제목을 꽤나 잘 만들어내는 작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잡지의 폐간으로 중도하차한 비운의 SF만화 <제 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우스개 만화처럼 보이는 제목이지만 꽤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제 멋대로’는 기존 통념과 관념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규칙이 지배하지 않는 랜덤한 우주 혹은 그 우주공간을 사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수식어다. ‘함선’이라는 정의도 멋스럽다. 작품을 보면 이해하겠지만 공간배경은 ‘함선’이라기보다는 ‘우주정거장’이다. 그런데 주인공 나머 준은 부임한 첫날 연설에서 디오티마가 우주정거장이 아닌 인류역사상 최초의 우주함선이라 불릴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작품의 도입부에서 ‘정거장’과 ‘함선’을 구분하고 주인공의 존재와 앞으로 풀어갈 이야기에 대해 깊은 복선을 깐다. ‘디오티마’라는 제목도 마찬가지다(디오티마에 대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 <헬무트>는 주인공의 이름을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했지만, 중세시대에 시대의 관념을 벗어나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이단으로 몰린 주인공 헬무트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그리 나쁜 작명 솜씨는 아니다. 그리고 세편의 학원물인 <정말로 진짜>와 <올웨이즈> <어색해도 괜찮아>도 적당히 가벼우면서도 내심 무언가를 기대하게 하는 예쁜 제목들이다. ‘어색해도 괜찮아’라는 제목이 관계와 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타인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려는 순간을 얼마나 잘 묘사한 것인지, 권교정의 팬이거나 이 만화를 먼저 읽은 사람이라면 쉽게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를 현실로 되돌리다

<어색해도 괜찮아>는 이제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이긍하와 한강, 소현민, 최정언, 정희정, 김덕현의 이야기다. 서로를 향한 호감, 엇갈리는 감정, 오해와 그것들의 드러냄이 작품의 뼈대다. 이 두줄이 <어색해도 괜찮아>의 모든 것이다. 만화, 그리고 유행하는 학원만화에 대한 고정관념만 아니라면 이 두줄로도 <어색해도 괜찮아>에 대한 훌륭한 리뷰가 완결될 터인데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2002년 오늘, 우리나라에서 학원물은 트렌드다. 그것도 10대 초반과 중반의 여학생 독자를 겨냥한 순정만화 잡지에 실리는 만화들의 대부분은 학원만화다. 연재만화도 그렇고, 미니시리즈도 그렇고, 단편도 그렇다. 학원만화라는 장르는 만화에서만 도드라지는 장르로 ‘배경이 학교’라는 단 하나의 조건만으로 장르의 필요조건이 충족된다. 학원물이 창궐한 배경에는 독자엽서와 잡지 편집부가 있다. 몇 퍼센트에 불과한 독자엽서가 독자들의 취향을 대변하고, 이 몇 퍼센트의 취향은 트렌드가 된다. 그 결과 독자들의 연령(더불어 수준까지)은 지속적으로 하향조정되고 있다.

배경이 학교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하고도 명료한 조건은 학교를 격투장으로, 멋진 서클활동의 공간으로, 화려한 연애의 무대로 만들고 일상을 지워버렸다. 독자들은 내가 살아가는 공간과 판이한 공간인 학교를 볼 수밖에 없었다. 권교정의 학원만화는 다른 학원물에서 지워진 일상을 복원시켰다. 성적에 대한 고민이 있고, 체육시간의 무서운 물구나무서기가 있고, 합반수업이 있으며, 식사시간이 있다. 현실의 학교보다 이상의 학교에 가깝지만, 적어도 그 안에는 학생들과 그들이 생활하는 일상이 있다. <어색해도 괜찮아>의 주인공들은 바로 나처럼 SICAF에 가고, 에버랜드에 가며, 박물관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이 일상성은 내 마음의 장벽을 허문다. ‘그건 뻥이야’라는 마음이 무너지고 나면 주인공들의 기분에 감염된다. 그들의 고민이 내 고민이 된다. 상대방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해 고민하는 긍하와 강의 내면이 나의 내면과 일치되는 순간 나도 답답해지고, 사랑이 조금씩 진전되는 순간 나도 두근거리게 된다. 아! 뻥이라는 걸 확실히 내비치는 많은 만화들이라면 책을 덮으면 금방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어색해도 괜찮아>는 아주 오래 내 마음을 간섭한다.

보편적 경험에 호소하는 학원만화

이건 풍만한 가슴의 노출이나, 팬티의 노출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과 다른 성질의 것이다. 조금 더 내면적이고, 조금 더 감성적이다. 그래서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한다. 가슴 한편이 아프고, 내려앉고, 싸한 느낌. 이 만화를 본 사람이 30대라면 10년 전에 느낀 기분일 것이고, 20대라면 불과 몇년 전이나 지금 느끼고 있을 기분이고, 10대라면 이제 곧 감당해야 할 느낌이거나 막 발을 담근 열병일 것이다. 나는 그랬다. 20살 때, 누군가를 만나고 난 뒤 “나도 모르게 휘둘려버리”게 된 기억이 있다.

비단 사랑의 감정만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경험하는 여러 감정 중 얼마쯤은 <어색해도 괜찮아>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단행본 3권 123쪽부터 134쪽까지 모두 11쪽은 다른 만화에서 본 기억이 없는 매력적인 시퀀스다. 일상의 소음들(하교시간 학생들의 잡담)이 그대로 살아 있고, 칸의 세밀함과 넉넉함으로 호흡을 조절한다. 처음에는 희정과 하교하는 긍하의 모습, 긍하의 내레이션, 우연히 긍하의 시야에 등장한 정언, 정언의 내레이션, 다시 희정과 긍하의 대화, 천천히 걷다 서다 걷는 정언의 발, 그리고 주변의 대화들, 정언의 내레이션. 바로 내가 언젠가 경험했던, 일상의 어느 한순간에 번접한 공간에서 분리되어 나만이 혼자 있는 것과 같은 느낌, 바로 그 느낌을 전해 주는 대목이다. 쉽지 않은 감정의 표현을 상황과 감정을 교차시키며 독자들을 서서히 동일한 감정의 늪으로 끌어당긴다.

<어색해도 괜찮아>는 마지막 5권을 남겨두고 있다. <올웨이즈>를 소개하며, ‘다시 문제는 이야기다’라는 화두를 던졌는데, 마지막 단행본의 출판을 기다리며 ‘일상의 감정’이 만화라는 매체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함께 지켜보자. 좋은 만화는 독자를 기쁘게 한다.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