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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
2002-08-27

우리 시대를 위한 심리학적 처방전

사흘 만에 서평을 써달라는 ‘부당한’ 요구와 함께 퀵서비스로 배달된, 무려 520페이지 분량의 소설. 여름마다 심하게 앓는 버릇이 있는 비평가는 고열에 시달리면서 읽기를 시작하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후회하는 마음이 싹터 있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함께 몸에 안정을 얻은 비평가의 마음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으니….

<열정과 불안>의 작가가 남달랐던 것은 두개의 시선을 함께 취한 데 있다. 그는 한번은 남성의 시각으로(1부) 다른 한번은 여성의 시각으로(2부)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것은 기술적인 시점 처리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여성주의적’ 시각의 맹점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이 시점 처리에 응결되어 있다. 1부의 주인공 영준은 우여곡절 끝에 자기가 창업한 벤처기업에 사표를 던지고 ‘눌라치타’라는 먼 유토피아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난다. 1990년대 후반기에서 현재까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벤처열풍이 한편으로는 한국 자본주의의 첨단적 재편성 과정에 불과했음을, 그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다시 한번 병적인 욕망에 시달리는 진통을 겪었음을, 영준‘들’의 사연은 여실히 보여준다. 돈과 권력을 향한 욕망은 음모와 배반을 낳는다. 그러나 작가는 이 열풍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인물들을 그려낸다. 영준, 주영, 재호 등은 민혁과는 달리 ‘남성주의적’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난류(亂流)에서 스스로들을 건져올리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2부에 이르면 한국사회의 정신병리학적 구조에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고자 한 작가의 의욕은 빛을 더한다. 신경정신과 의사로 등장하는 독신여성 인호의 시선을 빌려 작가는 젊은 날의 이상을 저버리고 돈과 권력을 향한 투쟁에 영혼을 불태우고 있는 남성들, 그 어두운 열정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성장기의 정신적 외상과 고통을 조명해간다. 그러나 작가의 깊은 문제의식은 인호를 통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문제를 깊이있게 파헤친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내 남성 포비아는 아버지가 모티브만 제공했고 절반 이상은 내 스스로가 발전시켜 온 것 아닐까.…”(2권, 152-3면)

1부에서 자유연애주의자처럼 나타났던 인호는 2부에 이르러 상처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를 다스려 아버지, 어머니와 화해를 이루고 수혜라는 열일곱살 소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기에 이르는 성숙한 여인의 본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쓴다. 그녀에게는 영준과 마찬가지로 병적인 것, 부당한 것에 거부하고 분노할 줄 아는 열정이 아직 간직되어 있다고. 영준이나 인호나 모두 스스로의 과거를 성숙하게 다스려 새로운 가치를 수립해가는 문제적 인물들이다.

‘남성주의적’ 논리에 휩쓸린 세계를 비판하는 데 머물려 하지 않고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영혼 내부로부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려 한 것. 이것은 지난 10년 동안 어느 여성작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열정과 불안>의 작가는 전경린의 ‘정신분석’과 은희경의 ‘세태’를 종합하면서 그보다 더 높은 국면을 제시한다. 이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열정과 불안>은 저마다 정신적 외상을 안고 이 시대의 난류 속을 헤쳐가고 있는 한국인들이 그 남녀의 구분없이 읽어볼 필요가 있는, 자성의 매개체가 될 만한 작품이다.(전 2권, 생각의 나무 펴냄) 방민호/ 문학평론가 rady@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