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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2002 되짚어보는 충무로 검열의 역사(1)
이영진 2002-08-30

정권은 가도 검열은 남았다

<오발탄>부터 <거짓말>을 거쳐, 충무로 검열사 40년 동안 새어나온 한숨과 신음은 헤아릴 수 없다. 무엇보다 1990년 이후 심의 기록조차 폐기되고 사라진 마당에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이, 어떤 이유로 잘려나갔는지조차 알 수 없다. 상상력과 현실을 담았던 필름은 소실됐고, 그 쓰디쓴 기억을 복원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어떤 이는 아무도 모르게 망자가 됐고, 어떤 이는 일부러 망각했다. 100여편 넘게 찍었다는 노(老)감독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말만 반복했다. 영화의 역사는 곧 검열의 역사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혹자는 검열의 시대는 갔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8월27일,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죽어도 좋아> 재심의 결과를 점치면서 <씨네21>은 사라진 기억을 불러오진 못해도, 남은 기억의 잔해를 곱씹을 필요는 있다고 느꼈다. 서슬퍼런 검열이 예방치료였는지, 과실치사였는지 아니면 음모교사였는지는, 충무로 검열사 40년의 불완전한 기록를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기에. 편집자

참고자료 ┃

<동아연감> <연합연감> <한국영화연감> <한국영화전사>(이영일, 삼애사) <표현의 자유 침해백서>(민예총·문화연대) <변방에서 중심으로>(서울영상집단 엮음, 시각과 언어) <한국영화100년>(호현찬, 문학사상사)

“왜 깡패 이야기하고 식모 이야기밖에 없었느냐고? 몰라서 그렇지 검열은 일제시대보다 더 심했다고. 영화를 만만하게 본 거지. 검열관들은 무조건 잘라대고, 감독들은 검찰에 불려가고 그러니까 찍을 수 있는 게 뭐가 남겠어. 결국엔 그런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거지. 거기에다 관객은 한국영화 저질이라며 매도해대지. 이중고의 수난을 겪은 셈이고 악순환을 반복한 셈이지.”(정일성 촬영감독)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 비상계엄 선포. 육사생도 군사혁명 지지, 시가행진. 용공분자 2천여명, 깡패 4200여명 검거. 대학생 교복 착용 및 중고생 삭발령. 사상관계 서적검열 위해 출판사 등록규정 마련

누가 4월을 보았다 했는가. 어스름한 새벽을 틈타 들어선 군부정권. 이는 ‘검열제국’의 부활을 의미했다. 4·19혁명의 기운을 받아 만들어진 민간심의기구, ‘영화윤리전국위원회’는 순식간에 스러졌다. ‘통제’를 골자로 한 영화법이, 그리고 가위를 든 문화공보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검열은 공고했고 집요했다. 제작가단체 각본심의위원회, 문화공보부를 거친 시나리오만이 영화제작이 가능했고, 완성된 필름 또한 검열을 통과해야 상영이 가능했다. 이른바 3중 차단막이었다. 그 과정에서 “적성국가를 유리하게 할 우려” 등 18개 세부조항에 어긋날 시엔 여지없이 삭제 위협이 가해졌다. 처음으로 단두대에 선 작품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재상영을 위한 검열과정에서 극중 대사 “‘가자, 가자’가 월북을 암시한다”는 지적이 떨어졌다. 상영금지! 63년, 문화공보부 장관과 친분이 있던 영화평론가 닥터 메케인이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상영할 작품으로 점찍기 전까지, <오발탄>은 27개월 동안 창고에서 숨죽여야 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65년

대한민국 국회, 전투부대 파월동의안 통과. 명동거리엔 경박한 몽키댄스와 함께 비틀스식 더벅머리가 인기. 숀 코너리의 007식 패션바지도 각광.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표절, 가사 저속, 왜색 등의 이유로 방송 금지. 남정현의 소설 <분지>, 북한 잡지에 게재됐다는 이유로 금서목록에 오름.

‘베트콩’의 승승장구 때문일까. 연일 게릴라들의 사이공 진격 소식이 조간신문 1면을 통해 전해져오면서, 체제전복에 대한 군사정권의 공포 또한 급속히 달아올랐을지도 모른다. 이로 인해 ‘불온세력’에 대한 정부의 단속은 매섭다 못해 엉뚱하기까지 했는데 그 행태가 보이는 대로 휘두르는 취객의 행패와 다를 바 없었다. 2월5일, 반공법 제4조 1항 위반혐의로 구속된 이만희 감독 역시 피해자 중 한명이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강용구 검사는 이 감독의 가 “국군을 무기력하게 묘사한 반면 괴뢰군을 용맹한 군대로 그렸다”면서 북괴를 찬양하는 ‘용공영화’라는 혐의를 뒀다. 꼬투리는 대수롭지 않았다. 당시 이 감독과 함께 조사를 받았던 이해윤씨에 따르면, 검찰의 추궁이 “인민군복이 어째서 국군복보다 더 멋있느냐”는 것이었다. 극중 전향하는 인민군 역을 맡은 주인공 구봉서의 의상이 ‘삐까뻔쩍’했던 것이 탈이었다. 한해 동안 제작된 반공영화가 189편. “총탄 한방에 (적군) 수십명이 쓰러지곤 하는” 클리셰를 어긴 것이 죄라면 죄였다. 결국, 영화는 개작 명령이 내려졌고, ‘여포로’라는 제목도 “북한을 중심에 놓고 지은 것”이라며 상영시에는 <돌아온 여군>으로 제목을 바꾸어야 했다.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이 구형됐던 이 감독은 이후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지만, 이 와중에 그를 지지한 동조자에 대한 수사도 진행됐다. 3월25일, 일본서 열린 세계문화자유회의 세미나. 유현목 감독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다만 자유진영의 전초기지라는 입지적 조건 때문에 반공이 국시로 주장되고 있을 뿐”이라고 발언했다. 곧이어 그에게 ‘반공법 위반’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졌고, 여기에 ‘음화제조’라는 죄명이 추가됐다. <춘몽>(1965) 제작시, 여배우 박수정(25)의 누드장면을 찍었다는 이유였다. 감독은 촬영 당시 살색 스타킹을 부착하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이후 누드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 자진 삭제한 장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건 소용없었다. 이미 세미나 발언으로 미운털이 박힌 그에게 검찰은 사전에 입수한 홍보용 스틸 사진을 들이대며 옥죄었다. 적(敵)을 뉘여야 아(我)가 선다는 이데올로기가 광포하게 몰아치던 때였다.

1969년

3선개헌, 국민투표 결과 통과. 아동만화윤리위원회, 서울시내 2천여개소에 이르는 만화대여소의 ‘불량만화’ 수거 실패. 극장, 64년 입장세 총액 5억5200만원에 비해 4배 가까이 늘어난 19억9200만원의 수입. 당구장, 경마장, 터키탕, 골프장 등 수입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미니스커트의 대중화, 시스루 룩의 등장.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아폴로 11호의 달나라 탐사 성공 여부에 쏠리는 동안, 검찰은 대규모 ‘음란물 특별단속반’을 꾸려 음란물 색출에 열을 올렸다. 영화계라고 비켜갈까. 흥행작 3편의 감독이 음화제조 혐의로 동시에 입건됐다. 표적이 된 작품은 박종호 감독의 <벽속의 여자>(19만5786명), 신상옥 감독의 <내시>(32만540명), 이형표 감독의 <너의 이름은 여자>(16만6044명). 검열 삭제된 필름을 갖고서 내사한 결과였다. 검찰은 이들 작품이 “성욕을 흥분, 자극시키고 선량한 도덕관념에 위배되는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에 불려갔던 이형표 감독에 따르면 “극중 성불구자 남편을 둔 여인과 젊은 남자가 벌이는 정사장면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었다. 검사가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냐고 캐물었던 건 관계 뒤 남자가 너무 피곤해하며 드러눕는 장면이었다. 김지미, 문희, 윤정희 등 주연배우들도 검찰의 ‘부름’을 받았고, 모두들 “감독의 강요에 이겨 어쩔 수 없이 찍게 된 것”이라고 답했으며, 결국 감독들만 줄줄이 입건됐다. 영화계 일각에선 검열을 통과했는데 이를 형사처벌하려는 건 ‘너무한 처사’라는 반발 의견이 일었다. 검찰도 지지 않았다. “문공부의 기준과 검찰의 기준은 다르다. 일부분이라도 음란성이 있다면 음란물”이라고 잡아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