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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 망가 미술관,이시노마키 망가탄 박물관 기행기
2002-09-05

일본 만화의 저력을 보고 오다

비만 지겹게 내려 그다지 여름 같지 않았던 여름을 다 보낸 8월22일 아침 9시 일본 아키타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한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아키타(秋田). 아마 마쓰다 망가 미술관(增田町まんが美術館)만 없었다면 특별히 찾을 일이 없었을 곳이었다. 산과 산 사이에 있는 작은 공항으로 비행기는 가뿐히 내려섰다. 강원도 아니면 충북 어디쯤을 연상시키는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공항을 빠져나와 버스로 1시간1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논과 논 사이 몇채의 작은 집들 사이에 들어앉은 마쓰다 망가 미술관이었다.

모두 2층으로 된 지역 문화시설인 ‘푸레아이 플라자’는 500석 규모의 공연장과 5만권의 도서를 소유한 도서관과 회의실, 세미나실과 함께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 및 캐릭터 상품매장을 갖추고 있었다. 다카라즈카시의 데즈카 오사무 박물관이나 미타카시의 지브리 미술관처럼 짜임새 있고 화려지는 않지만 매우 소박하게 지역주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받아내는 공간임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산골 작은 도시인 이곳에 망가 미술관이 들어선 이유는 1939년 마쓰다에서 태어난 일본의 대표적 만화가 야구치 다카오(矢口高雄)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야구치 다카오는 아키타의 산과 강에서 모티브를 얻었음이 분명한 자연적인 작품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대표작 <소년 낚시왕>(釣りキチ三平)은 1973년부터 <소년 매거진>에 연재된 작품이다. 맑고 높은 산과 바다와 거기에 살고 있는 물고기는 아키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환경이었다. 상설전시관은 <소년 낚시왕>을 거울에 새긴 파티션에서부터 시작해 나무판에 활자를 인쇄해 작가의 작품세계를 충실히 보여주었다. 특이한 것은 작가의 작업실을 그대로 재현한 ‘만화공방’(まんが工房)이었다. 나무 의자에 감추어진 민물고기들을 찾아보면, 거대한 나무를 가운데로 2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복도가 있다. 이 복도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대표 작가 60명의 패널과 원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1층에 위치한 기획전시관은 특별 기획전시를 진행하는 곳이다. 이번에는 야구만화 <도카벤>으로 시대를 풍미한 미쓰시마 신지 특별전이 있었다. 매우 평범한 공간이지만, 자신의 고향을 대표하는 작가를 기념하는 미술관을 만들어 지역주민이 활용하는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만화가 선생님들의 손때가 묻은 주택들이 무관심 속에서 다세대 주택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떠올라 한편으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일본 SF만화의 아버지를 기억하다

마쓰다 망가 미술관에서 나와 차를 타고 센다이(仙台)로 향했다. 한적한 시골의 고속도로를 남쪽으로 달린 지 몇 시간이 흐르자 꽤 커다란 도시가 등장했다. 다음날, 센다이역에서 열차를 타고 이시노마키(石卷)로 향했다. 이시노마키역에서 내려 <사이보그 009>에 등장한 캐릭터 동상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만화의 거리를 지니자 바다 옆에 웅장한 우주선이 내려앉아 있었다. 작가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세계에 정보를 발신하는 우주선’이라 명명한 이 거대한 건축물이 이시노마키 망가탄 박물관(石ノ森萬畵館)이었다. 작가들의 핸드프린팅을 지나면 작가의 손이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민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이보그 009>의 복장을 착용한 안내원들이 손님을 맞는다. 널찍한 공간에 조성된 캐릭터 가게 너머의 거대한 <사이보그 009> 벽화가 매력적이다. 어린 시절, <사이보그 009>를 보며 느꼈던 가슴 떨리는 흥분을 다시 경험할 수 있었다. 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긴 복도에는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여러 작품에 등장한 캐릭터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 일본에서는 자신의 고장을 대표하는 작가를 기념하는 만화 미술관을 만들고, 그곳을 주민들의 문화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부러운 모습이다.

바로 그 복도에서 의미심장한 전시물을 발견했다. 사무라이들의 액션 동작을 담은 만화 한 페이지에서 캐릭터와 동작선을 분리하고, 다시 거기서 동작선을 분리해놓은 전시물이었다. 만화가 평면을 통해 어떻게 공간을 주조하며, 분절을 통해 어떻게 연속을 구현하는가를 웅변하는 전시물이었다. 상설전시관은 <만화선언>부터 시작되었다. 망가가 만화(漫畵)가 아니라 만화(萬畵)인 것은 그 표현이 방대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기 때문이라며, 영어로는 Million Art이며, 따라서 Manga의 MA는 Million Art의 약자라는 선언이었다. 꽤나 도발적이지만 만화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선언을 뒤로하면 데즈카 오사무가 이시노모리 쇼타로, 후지코 F. 후지오 등과 기거하며 신진작가를 길러냈던 도키와장의 디오라마가 재현되어 있었다. 여기에 도키와장에 대한 인터뷰와 컴퓨터로 제작한 지도는 데즈카 오사무와 도키와장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그뒤에 펼쳐진 세계는 <사이보그 009> <가면 라이더> 그리고 또 하나의 액션 히어로인 <키카이거>의 독무대였다. 캐릭터의 매력을 십분 활용한 전시는 방문자들이 직접 게임을 즐기게 꾸며놓기도 했다. 고전적인 관념의 미술관, 박물관보다는 만화,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작품의 세계로 빠져들도록 만든 작은 테마파크였다.

가장 인상깊은 전시는 ‘시대극의 세계’라는 섹션이었다. 벽지를 일본 전통화로 꾸민 이 섹션에는 벽에 반부조로 일본의 전통가옥을 설치해놓았다. 그리고 창호지를 조금씩 뚤어 그 안에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사극에 등장한 한 장면을 평면 디오라마로 구성해놓았다. 제일 번득이는 아이디어는 훔쳐보기류의 구멍이 어린이 눈높이에 있으면, 어린이만화의 장면을, 어른들의 눈높이에 있으면 어른들이 좋아하는 섹슈얼한 장면을 설치했다는 점이다. 지브리 미술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망가탄 박물관도 역시 어린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전시를 구현했다.

방문자 눈높이에 맞춘 전시의 구현

이 두곳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박물관으로는 도쿄의 지브리 미술관, 다카라즈카의 데즈카 오사무 박물관, 고지의 요코야마 류이치 기념 박물관이 있다. 이들 박물관은 만화는 무엇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웠다. 만화는 복제예술이며, 대중에게 사랑받는 매체다.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에 맞는 전시기획을 하고, 전시제작을 하려고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