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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그 60년 전으로 <호비트>
2002-09-05

컴퓨터 게임

나이가 좀 있다면 <부루마블>을 알 것이다. 보드, 즉 말판을 돌며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상대 플레이어로부터 요금을 갈취하는 게임으로, 원조격인 <모노폴리>의 인기를 능가하며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대유행이었다. 하지만 곧 열풍이 꺾이고 씨앗사 등에서 만든 다양한 보드게임이 문방구에서 팔리며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지만 보드게임의 시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국내에서 보드게임은 마이너 장르고, 플레이어는 많지 않다.

얼마 전 <호비트>란 보드게임을 구입했다. 이 게임은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이 쓴 동명의 소설에 기반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보다 60년 앞선 샤이어력 2941년에서 2942년 사이 프로도의 양아버지 빌보가 갠달프와 드워프들과 함께 드래곤 스머그가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다. 빌보가 절대반지를 얻은 게 바로 이 시절이다.

게임의 출발점은 빌보의 보금자리인 호비튼의 백엔드다. 말판 위 머크우드, 롱 레이크 등 낯익은 지명들을 거쳐 스머그가 사는 론리 마운틴으로 가야 한다. 게임은 카드와 주사위를 통해 진행된다. 주사위를 굴려 눈 수만큼 전진하고 카드를 뽑는다. 어드벤처 카드는 원작의 내용을 재현한다. 갑자기 트롤이 나타나 빌보를 간식거리로 삼겠다고 으르렁대는가 하면 고블린들이 떼로 나타나 나무 위로 도망쳤더니 불을 지르기도 한다. 이때 의지가 되어주는 건 역시 갠달프다. 스팅이나 오크리스트 등 쓸 만한 무기를 주는가 하면 라이트닝 볼트를 적한테 내리꽂기도 한다. 샘 갬기가 그렇게도 노래를 불렀던 로프 역시 중요한 아이템 중 하나고 영화에서 대머리로 나타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던 엘론드도 이번에는 멀쩡한 얼굴로 등장해 친구로서 빌보의 모험을 돕는다. 아무도 없다면 운에 맡기고 뺑뺑이를 돌릴 수밖에 없다. 가끔은 골룸이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기도 하고, 원작에 등장한 구절을 딱 한번만 읽고 외워서 읊어보란 요구를 받기도 한다.

톨킨의 대단한 팬도 아니고 해서 설렁설렁 시작한 게임이지만 하다보니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들었다. 게임을 하다보면 때로는 과감한 도전이 또 때로는 치밀한 계산이 필요하다. 전략성이 높기로 말하자면 웬만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 뒤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기로 말하자면 또 어떤 액션게임보다 못할 게 없다. 가능하면 신속하게 전진해 론리 마운틴으로 가 스머그와 대결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플레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느리더라도 천천히 경험을 쌓으며 내실을 다지는 사람이 있다. 상대의 플레이에 맞춰 순간순간 기민하게 행동을 바꿔야 한다. 치열한 공방 속에 역전과 역전이 거듭되고 처음엔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어느새 살벌해지기도 한다.

이 게임을 그대로 PC로 옮겨놓는다면 어떨까? 시스템이 좋으니 재미가 없지야 않겠지만, 직접 말판을 깔고 하는 것보다는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소용없다. 전화를 수십번 돌려 바쁘다는 사람들을 끌어낸다. 오랜만에 바닥 청소도 하고 말판을 깔고 이것저것 늘어놓는다. 좋은 카드를 뽑으면 괴상한 춤으로 기쁨을 표현하기도 하고, 상대가 곤란에 빠지면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기뻐한다. 시간과 장소, 무엇보다도 마음의 준비 없이는 할 수 없는 게 보드게임이다. 다른 일 하다가 문득 생각나면 PC를 켜서 즐기는 게임과는 전혀 다르다. 한달에도 수십개의 게임이 쏟아지고, 그중 너무 길고 어려운 게임은 외면당하는 현실이다. 보드게임의 좋은 시절이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