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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우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_ STAGE4 (4)
2002-09-07

STAGE4 - “최고 winner는 영화 보고나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야

보고나서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영화는, 이제까지 장 감독 영화 중에는 없었다. 거꾸로 슬퍼지는 게 대다수였다. <성소>에서 행복을 느꼈으면 한다고 하지만, ‘영화 보고 슬픈 관객도 위너’라는 단서를 붙인다. 그 행복과 슬픔의 관계가 미묘하다.

전에 <성냥팔이 소녀>에 담긴 기독교적 구원의 정서가 싫어서, 그걸 깨고 싶다고 했다.

→ 그걸 깨고 싶다는 거는 그냥 단순한 거지. 성냥팔이 소녀가 우울하게 죽지 않으면 안 될까. 좀 행복함을 찾아주면 안 될까. 불쌍하잖아. 내가 사디스트도 아니고. 불쌍한 걸 즐기는 게 아니지. 성소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시작한 거지. 그런데 그 생각만으로 발칙할 수 있지. 전복적일 수 있지. 순수한 동기라 해도.

성소를 행복하게 해주려면 살려서 돈, 명예, 사랑 그런 거 주면 되는데, 왜 나비는 죽이고.

→ 행복하려면, 독을 독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잖아. 그런 행복은 그만한 싸움과 인내의 결과로 얻어지는 건데.

<성소>에서 성소는 현실 속에서 승자의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지구도 아닌 것 같은 섬으로 가지 않나.

→ 그게 지구 어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들 하지? 꼭 지구에 있어야 행복하냐고. 지구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는 거지. 어차피 뻥인데. 어디서 살든 그냥 행복하면 어때. 그러면 좋잖아. 그리고 거기는 아무것도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고 하잖아. 날짜도 모르고. 사실 나한텐 행복이 그래. 날짜 시간 모르고 이름도 없어서 차별하지 않고. 그냥 행복한 느낌 그 감성 그걸 좋아하거든. 물 속에서 물고기랑 놀 때 말 타고 달릴 때, 그게 행복의 이미지거든. 현실 속에 자질구레한 행복 많이 있겠지. 근데 선방에 앉아 있는 거 되게 행복하거든. 그냥 생각을 버리고. 거기도 이름 없어서 행복한 거야. 원주민이나 우리 옛날 삶의 방식도 그랬을 거야. 우리의 천족들은 신과 인간의 구분없이 살았던 이상적인 시대가 있었을 거라고 보거든. 그 이상적인 시대가 꿈인지 현실인지 말할 수 없잖아. 여기서도 이상적인 현실을 누릴 수도 있고 또 영원히 못할 수도 있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지. 행복이 총탄으로 얻어지면 좋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더라고. 그래서 <성소>의 엔딩도 촬영 중에 바뀌었고.

<거짓말> 끝나고서 “예술가는 도 통할 수 없다”고 했다.

→ 난 도 통하면 영화 안 할 거야. 당연히 못하지. 도 통하면 무사인, 아무것도 할 일 없는 사람이 되는 거거든. 그런데 영화를 하고 있으니까. 진짜 도 통하면 아무 구별이 없어서 영화를 통해 무엇을 얘기한다 하는 욕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집착도 없겠지. 진짜 행복한 경지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비애나 슬픔, 그런 걸 어떻게 넘어가게 할까가 그 사람의 일이 될 것이라고 보거든. 그러려면 그 사람이 행복해야 돼.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행복해진다. 나도 큰스님 옆에 있으면 행복하다, 보기만 해도 행복하고 야단 맞으면 더 행복해. 그게 바로 에너지고 기야. 그 속에서 존재 자체가 사람들을 끌어올리고 업시키지. 사람들이 그 옆으로 모이는 게 그 기운을 받으려고 하는 거지. 나는 아직도 사람 내쫓잖아. (웃음) 사악한 기운으로 쫙 쫓잖아.

<금강경>을 읽고나서 슬펐다고 말했는데.

→ <금강경>은 부처가 말하는 구도자의 길이지. 모든 사람을 평안하게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이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버려야 하고, 살아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하고, 개체라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나눠지지가 않아. 그러면서 진실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이다, 몸이 몸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라고 부른다 그러거든. 나중에 가면 너무 허무해서 슬퍼. 어떤 슬픔이 좍 오는 경전은 처음 봤어. 흔히 <금강경>은 공(空)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말하는데, 그 비어 있음을 울리는 슬픔. 그러면서 세상은 모든 살아가는 게 다 헛되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 같고 환상 같고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

<성소>를 보면서 나비가 죽을 때 관객이 슬픈 감정을 가졌으면 싶다는 말도 했다.

→ 그건 <금강경>을 완벽하게 소화못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이야. 공허하니까 슬퍼져. 텅 비어 있다면 사실 안 슬퍼? 우리 감성적으로. 진짜 아무것도 없어. <성소> 엔딩에 다 깨지고 홀연히 UFO가 떠오는데, <금강경>을 볼 때 느낌도 그래. 되게 슬퍼. 충분히 섭취 못해서 그럴 거야. 그걸 완전히 소화하면 황홀감을 느낄 거라고. 어떤 경지에 대한 기쁨이 훨씬 크거든.

자신은 슬프면서, 행복을 느끼는 관객이 위너라고 하는 건 모순 아닌가.

→ 그게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결과일 수 있다니까. 모든 것을 가치의 양극단에서 보면 안 된다는 거지. 세상의 내용은 그렇게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거지. 기쁨과 슬픔이. 꿈과 현실도 나눠지지 않고. 그런 건 말로 하기 힘들어서 옛날부터 화두로 얘기하는데, 마지막 장면은 화두로 생각해주면 편해. 거기서 관객이 가질 여러 가지 감정을 나눠보는 건, 다 가능하다라는 얘기일 거고. 그걸 떠나서 보길 바래. 거기 감춰진 상징과 기호를 해석, 분석하고 보는 것보다 아무 생각없이 그 순간 흘러가는 걸 즐기길. 그건 굉장히 중요한 자세거든. 사는 데 있어서도. 그 순간의 느낌을 최대한 누리면서 사는 게 오래 살고 잘사는 거지. 게이머들은 무조건 게임을 즐겨. 안 되면 다시 게임에 들어가고 들어가고.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거야. 영화도 클리어를 하는 순간까지 보고 또 보라는 거지. (웃음) 많이 볼수록 좋다. 그렇게 짜여져 있다고 보는 거야. 다 똑같은 느낌으로 좋아한다면 게임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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