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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상 알리는 다큐 찍으면서 영화 배웠지˝
2002-09-11

1950년대 기록영화 감독으로 출발,영진위 위원으로 활동 중인 영화감독 이형표

이번호부터는 전쟁의 여진이 옅어지며, 산업화와 변화의 전조가 짙어지던 시대의 생생한 풍속도 <서울의 지붕밑>(1961)의 이형표 감독(80)의 회고담을 싣는다. 50년대 초반, 주한미국공보원(USIS)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에서 외국의 영화 기술을 먼저 경험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 원로감독은 한국영화가 관객의 사랑을 흠뻑 받던 황금기의 증인이다. 그가 엄앵란 주연의 <말띠 여대생>으로 서울 40만명의 인파를 운집시킨 1963년, 서울의 인구는 150만명. 이처럼 한 시대 대중의 관심이 결집된 대상을 통해 당대를 읽어낼 수 있기에, 그의 영화는 시대의 거울로서 값지다. “재미있는 영화가 최고의 영화다”라는 신념을 관철해온 이 감독은 또, 몸소 경험해온 각 순간과 흐름들을 기억속에 차곡차곡 챙겨놓고 있는 한국영화사의 산증인이다. 80년대 특수영상 및 전시 기획자를 거쳐 현재 한국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으로 ‘여전히’ 활동 중인 이형표(80) 감독의 회고담을 경청하기로 한다.

그동안 <씨네21>에 실린 회고록들을 죽 살펴봤는데, 과거 촬영현장에서 있었던 자잘한 에피소드들을 기억하는 덴 영 자신이 없어. 나란 사람은 앞을 보고 달릴 줄만 알았지, 과거를 기억하는 법이 없거든. 그런 내가 이런 지면에 어울릴 만한 얘기를 쏟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야. 하지만 차근히 얘기를 꺼내다보면 뭔가 쓸 만한 얘기들이 나오겠지. 보통 이런 인터뷰엔 영화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부터 얘기하게 마련이잖아. 나에게 영화의 시작은 용돈벌이 삼아 시작한 한 아르바이트였어. 이구영 감독님이라고 <낙화유수>(1927, 복혜숙·이원용 주연), <수일과 순애>(1931, 윤봉춘·김연실 주연) 등을 만드신 분이 있는데, 그분 댁 따님을 가르치는 일이었지. 일종의 개인 교사라고 할까. 경성 사범 6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는 집에서 올라오는 용돈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어. 14살부터 먹는 거, 입는 거, 공부까지 스스로 해결하던 나였으니까. 학교를 다니면서도 늘 일거리를 챙기곤 했지. 운좋게 영화하시는 감독님 댁에서 과외를 맡게 되었는데, 지금처럼 영어, 수학을 가르친 게 아니라 글쓰기와 그림그리기 등 교양 쌓는 걸 도와주는 교사였어. 어려서부터 화가가 꿈이었던 난, 누구를 가르칠 만한 실력이라기보다는 그림 그리는 걸 도와주는 게 즐거웠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이구영 감독님이 내가 그린 그림과 그동안 끼적여논 글 나부랭이를 보시더니 “넌 영화를 하는 게 좋겠구나” 하시는 거야. 그러면서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그만큼 다재다능한 사람이 해야 하는 거지. 문화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쌓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조금도 게을리하지 말고 배우고 익혀라”라고 조언을 해주셨지. 거칠기만 했던 내 삶에서 처음 듣는 충고였고, 왠지 용기가 나는 말이었어. 해방이 되던 45년에 7년간 다닌 경성 사범을 졸업하고,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에 진학했어. 전공을 영어로 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어. 약소국민에게 강대국의 언어를 익히는 것은 미래를 약속하는 길이었으니까. 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영문과를 다니며, 미술과 함께 프랑스 시에 빠지기도 했어. 시의 참맛을 느끼려면 원어로 음미하는 수밖에 없겠다 싶어 그 참에 불어를 공부했지. 시는 일종의 음악이기 때문에 운율, 즉 리듬을 느끼기 위해선 쓰여진 그대로의 문장을 입 속에서 굴리는 방법밖에 없어. 번역된 시를 읽으면 라임(압운)이 일치되지 않아서 통일감을 찾기 힘들지. 깨어진 조각들을 씹는 기분만 들어. 끈끈하게 연결되면서 고조와 수평을 이루는 시의 리듬이 이미 산산조각난 거지.

시를 읽기 위해 불어를 익히는 등 조금은 낭만적이다 싶은 대학생활을 마치고, 미8군 홍보지인 <코리아 그래픽>의 편집 보좌관직을 거쳐 주한미국공보원(USIS) 영화부에 들어가게 돼. 다큐멘터리의 모든 것을 배운 곳이 바로 여기야. 곧 등장할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과 함께 내 인생에서 매우 뜻깊고, 중요한 곳 중 하나야. 공보원에 근무하는 2년여간 기록영화를 50여편 만들었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의 경과와 참상을 알릴 극장용 뉴스가 필요하게 됐고, 영화 제작관으로 있던 찰스 테너의 보좌관으로 리버티 뉴스 및 30여편의 미군 홍보 기록영화를 제작한 거지. 뉴스영화는 극영화와 달라서 배우나 무대장치, 그리고 각본이 필요없는 대신 풍부한 취재망과 기동성 있는 카메라맨의 배치, 기민한 편집처리 등 많은 점에서 특수한 기능이 필요하므로 극영화와는 별개의 기업체에서 제작됐어. 공보관 영화부는 바로 그러한 기록영화를 담당하던, 다큐멘터리의 산실이었지. 기록영화 찍다보면 카메라맨도 악조건하에서 저널리스트로서의 기민한 판단과 행동이 요구되므로 갑작스레 닥쳐오는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해. 당시에 내가 보좌관으로 따라다니면서 배운 건 단지 이론만이 아니었어. 기술자들을 데려다 매뉴얼을 일일이 번역, 설명해주면서 나 역시 기계에 대해 자세히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됐지. 직접 촬영현장을 체득할 수 있는 다시금 없는 좋은 기회였어.

구술 이형표/ 1922년생구술 50년대 미국공보원(USIS)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에서 군 홍보 및 기록영화 제작구술 미국 <NBC> <CBS>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뉴스 제작구술 60년대부터 극영화 86편 작업구술 <서울의 지붕밑> <말띠 여대생> <애하> <너의 이름은 여자> 등구술 80년대 중반 독립기념관을 비롯한 각종 전시관 기획, 설계, 시공 총괄구술 현재 등급위와 진흥위원회에서 활동 중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 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