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생각도감
김은형의 오!컬트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2002-09-12

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그녀

영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의 번역제목은 원제(Things You Can Tell Just by Looking at Her)에 아주 충실하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작가가 왜 이런 제목을 택했을까 궁금하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그녀를 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생활도 직업도 전형적인 중산층인 중년여성 키티의 집은 정갈하며 안온해 보인다. 그러나 전화벨만 울리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아닐까 조급하게 달려가는 그에게는 불안과 초조의 그림자가 넘실거린다. 그가 집으로 부른 점쟁이 크리스틴은 남의 운명을 읽는 사람이지만 집에 돌아가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랑하는 이(크리스틴은 레즈비언이다)를 무기력한 모습으로 지켜봐야 한다. 당차고 유능한 은행매니저 레베카는 유부남 애인의 아이를 가졌다. 애인도 그녀도 ‘당연히 유산시키야지’라고 생각하고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레베카는 거리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흐느껴 운다. 옆집 이웃으로, 회사 동료로, 설사 가까운 친구라고 해도 그녀들을 ‘보기만 해서는’ 그 삶의 신산스러움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삶은 자기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어떤 부분에서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성취한다고 해도 포만감을 느끼는 건 아주 짧은 순간뿐이다. 사랑이라는 것도 그런 것 같다. 상대방을 향한 시선은 어렸을 때 연필 자국을 지워가며 찾아가던 길찾기 놀이보다 훨씬 복잡하게 어긋나 있다. 어쩌다 행복하게 출발점과 도착점을 한줄로 잇게 돼도 그 기쁨은 잠시다. 허망함의 시간이 훨씬 더 길고 더 깊다. 영화에서 시각장애인인 캐롤은 자살한 여인을 수사하는 언니에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지쳤을 거야, 오지 않는 전화, 허무한 약속들, 알면서도 굴러 넘어지는 돌들에….”

사람들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번번이 눈앞의 돌뿌리에 걸려 넘어진다. 그래서 남보기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삶은 불현듯 해독불가능으로 다가온다. 왜 그랬을까, 왜 피하지 못했을까,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후회하고 번번이 다짐하지만 또다시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아이는 당연히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레베카가 수술 뒤 지독한 상실감을 느끼는 것처럼 때로는 스스로 단호하게 믿어온 것들에서조차 지독한 배반감을 느낀다. 물론 반복되는 부대낌과 피로함이 그 삶을 치명적으로 갉아먹는 것은 아니다. 키티는 전화를 기다리다가 결국 포기할 것이며, 크리스틴은 애인의 죽음을 겪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상처의 흔적은 그들의 삶 어느 구석에서 오래된 맹장수술자국처럼 쓸쓸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대단한 사건이나 사고가 벌어지지 않는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에게는 삶을 끌어가는 것이 대단한 사건이나 엄청난 열정, 이런 것들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알면서도 피하지 못하는 발뿌리의 돌들, 넘어지고 난 다음에 느끼는 아픔과 당혹스러움, 자기연민 같은 것들이 별볼일 없지만 그렇다고 참혹할 것까지는 없는 인생을 굴러가도록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의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이 좋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복잡한 관계들은 처음 예측치 못했던 방향으로 실타래를 맺는다. 키티가 좋아했던 남자는 수사관인 캐롤의 언니와 데이트를 시작하고 캐롤과 어색하게 헤어진 남자는 키티와 술집에서 관심어린 인사를 나누는 식이다. 그러나 언젠가 관계는 어긋나고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또다시 굴러 넘어진 자신을 돌아보며 고개를 떨구겠지. 그러면 어떤가. 어차피 bitter & sweet한 인생인 것을.김은형/ <한겨레21> 기자